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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 The Novice The Novice

    경태와 경석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일하고 공부하는 형제이다. 형제에게는 장기이식을 위해 입원한 아버지가 있고, 그들은 수술에 들어간 아버지가 깨어나기 전에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한다. 작은 시련이라면 장롱면허인 경태가 철없이 까불거리는 동생과 아버지의 짐을 챙겨, 수동 트럭을 몰고 고속도로를 주행해야한다는 것이다. 경태는 운전하는 것이 매우 두렵고 부담되지만 형제들 사이에서 으레 있을 법한 체면치레를 하느라 내색도 하지 못하고 편치 않은 고속도로 주행을 강행한다. 이 로드무비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안타까운 점은 어려운 상황에 빠진 청년(또는 소년)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나 어른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가장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인 대리운전 서비스는 아버지의 큰 수술을 앞둔 경태가 이용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비용을 요구한다. 또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오르기 전, 경태는 가장 가까운 가족인 작은 아버지의 가게를 찾아가지만 그는 소식도 없이 가게를 폐업하고 부재중인 상황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썰물처럼 밀려오는 상황의 압박 속에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어른인 아버지, 어머니, 작은 아버지, 간호사 등은 모두 부재하거나 전화기 너머 음성으로만 존재를 드러낸다. 사회적 능력이 아직은 미흡한 어린 형제는 크고 작은 문제적 상황에 노출되지만, 그들이 도움을 구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변성기 소년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가 될 사건을 목전에 두고, 동생은 형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혼자 감내하기 어려운 슬픔을 침묵 속에 묻어둠으로써 형의 시름을 잠시나마 덜어준다. 이들이 처한 상황이 처연하고 애처롭지만, 그리고 아버지의 구두가 형에게로 이행되면서 생계를 위한 고달픈 삶이 이어지겠지만, 이 영화가 비극적이기만 하지 않은 이유는 형제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 사이의 서로를 향한 우정이 회복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고운,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Tombstone Refugee Tombstone Refugee

    언제부턴가 애도는 대중들이 정치적인 행위에 가담하는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 요즈막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일련의 정치적 죽음을 애도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아가곤 했다. 물론 그때의 애도는 허용된 장소에서 평화적인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는 애도가 지닌 모종의 부정적 성격을 기존의 상징적인 질서로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장례식이라는 의례와 절차는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장례식을 치르는 데에도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례난민>은 그러한 상황과 마주한 극심한 빈곤층 가족의 이야기이다. 열네 살 소녀 다빈의 가족은 돈이 없어 엄마의 장례식을 치를 수가 없다. 엄마의 옛 주소지로 가면 저렴하게 화장을 할 수 있다는 말에 가족은 길을 나서지만, 설상가상으로 식당에서 음식값을 계산하지 않은 아빠가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다빈은 하는 수 없이 어린 동생 한솔과 함께 직접 엄마를 바다에 화장하기 위해 나선다. 영화는 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초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예컨대 한밤중 교통사고로 오고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관 속에 있던 엄마가 깨어나는 장면이 그러하다. 정상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그들은 심리적 현실 안에서 엄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엄마의 흔적은 그들이 되새기는 추억 안에서 만두로 나타났다가 급기야는 직접적인 엄마의 등장에 이르게 된다. 나의 상상적인 타자라 말할 수 있는 이러한 감상적 나르시시즘은, 죽음이라는 부재의 자리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상징적 절차가 불가능할 때 죽음을 심리적으로 실체화시킴으로써 빠지는 멜랑콜리와 유사하다. 다빈이 동생과 강가에서 치르는 엄마의 장례는, 바로 그와 같은 감상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물론 이러한 애도는 불완전하긴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죽음을 주어진 현실로 인정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애도를 하고자 하는 다빈의 완고한 태도는 한편으로 상징적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부정의 열망을 언뜻 내비치는 것처럼도 보인다.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추상화된 장례식 앞에서 망자는 어떻게 주체의 고유성으로 표시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던질 수 있는 정치적 질문이 있다면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이민호, 영화연구자)

  • OJT: On the Job Training OJT: On the Job Training

    자본주의 비판에 있어서 오늘날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매혹적인 구도는, 공리적인 이해타산을 쫓는 추상적인 자본과 그에 맞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격과 열정, 감성과 같은 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적인 발전 기획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해온 기업의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상시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철저한 합리성의 추구는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이 도입됨으로써 더욱 극대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제이티>는 신입사원 교육을 통해 이와 같은 회사의 합리적 이성의 모순을 꼬집는다. 정태는 회사가 들여온 신입 사원 ‘더블’이라는 인공지능 기계를 교육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회사의 지침에 따라 성장 지향적으로 더블을 교육하던 정태는 어느 날 회사 전체의 인력구조개편 방안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그 업무를 완수한 더블의 방안을 듣고 정태는 망연자실하고 만다. 더블은 22프로의 인력을 해고하라는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망설이던 정태는 문서를 위조해서 제출하지만, 결국 임원진 회의에서 이를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위기의 그 순간, 더블의 계산을 통해 인력을 절감하려 한 임원진에게 더블이 내놓은 대답은 임원진 자체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임원 모두가 이에 반발하며 회사는 기계를 반납하게 된다. 영화는 정태와 함께 성장의 뒤편에 가려진 사원들의 개별적인 ‘인적 요소’라 할 만한 것을 응원한다. 물론 그러한 개별성은 자본의 반대편에 있기는커녕 자본을 지탱하는 요소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비판의 대상은, 자본주의 자체라기보다는 회사의 권력층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자본의 타산성이 극한에 달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독특한 특징을 일별할 수도 있다. 궁극적인 성장모델인 인공지능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 외려 회사에 위기를 불러오듯이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언제나 자신의 반대편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인적 요소는 정확히 그 반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적 요소에 대한 장려는 작금의 세계가 그들을 관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민호, 영화연구자)

  • Tinted Tinted

    주인공 미숙은 흰머리를 빛에 비춰보며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아.”라고 중얼거린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머리의 색깔을 결정하는 멜라닌 세포가 감소하면서 모발의 색이 투명해진다. 흰머리는 보통 30대 중반 이후에 나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적이기는 하나, 스무 살 갓 넘어 결혼한 후 중고등학생 아이들을 둔 학부모이자 가정주부로 사는 서른아홉 살의 미숙의 바쁜 나날에 ‘흰머리’의 출현은 예기치 않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 갈수록 투명해져가는 것이 머리색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 있어 그녀의 존재감은 미비하다. 항상 집에 있는 존재로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주고,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는 존재로서의 미숙은 ‘김미숙’이라는 정체성을 빠르게 상실해가는 중이다. 슈퍼에서 파는 염색약을 사는 것도 쉬이 결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에 익숙지 않았던 그녀의 존재감은 의외의 곳에서 되살아나는 듯하다. 파트타임 알바로 가게 된 액세서리 제작업체의 팀장으로부터 “일을 빠르게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계속 나와줄 것을 요청받게 된 것이다. 망설이던 그녀는 마침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을 결정한다. 뒤이어, 머리를 염색하는 일도 결정한다. 그녀의 일상에 불현듯 찾아든 사소한 변화들이, 무심한 듯 위태로운 그녀의 희미한 미소 속에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심는 과정을 영화는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에게 찾아온 변화의 원인이 흰머리의 발생이 가져다 준 나이듦에 대한 공포, 혹은 흰머리처럼 자기 자신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기감뿐만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내면의 고통을 느껴본 자,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자만이 가지는 묘한 자신감이 그녀의 빨갛게 염색한 머리의 뒷모습에서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박준용 /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Night Working Night Working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린과 호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연희의 우정과 연대를 그린 김정은의 <야간근무>는,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 사이를 느슨하게 포개놓으며 두 인물의 현재를 응원한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커텐과 벽에 걸린 옷가지는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하늘거린다. 린이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며 나갈 채비를 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듣는 것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이다. 한국에 온지 4년이 지난 린은 야간에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연희와 친구 사이이다. 어느 날 린은 연희가 호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망과 섭섭한 감정으로 토라진 그녀는 자전거 수리를 위해 홀로 자전거를 끌고 먼 길을 걷다 멍하니 벤치에 앉는다. 이 순간 파도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린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이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편지는 창밖을 바라보는 연희의 어머니의 쇼트로 연결된다. 이제부터 연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날 준비를 하며 틈틈이 알바를 하던 그녀는,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다 지쳐 벤치에 앉는다. 이때 우리는 이 쇼트가 조금 전 벤치에 앉아있던 린의 쇼트와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동일하게 찍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연희의 앞에는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린이 서있다. 이 영화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있게 된다는 그 감각이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에 모종의 간극을 만들어내며 두 인물을 중첩시키는 과정을 닮고 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파도소리는 그들의 어머니를 소환시키며 린과 연희를 구조적으로 이어준다. 린이 4년간 겪어온 시간은 이제 연희가 앞으로 겪을 수도 있는 시간이 된다. 그런 점에서 첫 장면에 나온 린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반복되지만 그때 편지의 주체는 린이 아닌 (이미지에 나타나는) 떠나는 연희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장소에 있는 그들이 각각 지닌 공통의 기억과 꿈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쓴 것처럼 보였던 편지는, 린에게 귀속되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의 그들이 꿈꿨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개방한다. 따라서 연희에게 잘될 것이라 말하는 린의 격려는, 곧 자신의 현재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현재의 그들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결코 완결되었다고 할 수 없는, 그 잠재적 시간들이다. (이민호, 영화연구자)

  • Ambubagging Ambubagging

    이 영화는 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사 ‘민지’의 시점을 좆는다. 여느 병원의 의사들이 그러하듯 민지는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채 곧 숨을 넘길 듯한, 생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노인 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앰부배깅, 즉 스스로 호흡이 힘든 환자를 위한 수동식 산소공급조치뿐이다. 민지가 이 조치를 취하며 사운드를 통해 만들어내는 일련의 리듬은 매우 반복적이고 평화로운 느낌까지 자아낸다. 때문에 스스로 호흡 능력이 없는 이에게 제공되는 최후의 수단은 역설적이게도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료진들의 단조롭고 형식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이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임종을 앞두고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필사의 순간이지만, 정반대로 삶과 죽음에 수없이 노출된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무덤덤한 자연 질서의 형식적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공 민지는 다른 의료진들과는 조금 차별화된 태도를 보이지만, 내러티브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사로서의 도덕성과 연민은 그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연적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만약 민지에게 다급한 엄마의 전화가 없었다면, 더 나아가 난산을 겪고 있는 동생이 없었다면, 그 또한 병원 동료들처럼 환자의 생명에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앰부배깅은 의사가 환자에게 조치한 의료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생(生)과 사(死)에 무뎌진 이들을 향한, 그리고 일상의 나태의 빠진 관객을 향한 외부 산소공급 조치로써 도덕적 반성을 이끌어내는 치료행위일 것이다. (김고운,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A FETTER A FETTER

    커튼 뒤 여고생들이 뒤엉켜 몸싸움을 벌인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부분 클로즈업으로 진행되는 화면은 마치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 같다. 하지만 이 장면의 속내는 잔혹하다. 여고생 혜원은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어느 날 연수가 같은 반으로 전학을 오고 연수와 혜원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혜원과 연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만 허락된 한정적인 친구다. 혜원은 자신도 왕따가 될까 두려워 남들이 있는 곳에선 연수를 아는 채 하지 않는다. 혜원이 전학 온 이유가 조금씩 밝혀질수록 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이 모든 것을 벗어나기 위하여>는 교내 왕따 문제를 아릿하게 그린다. 모든 상처 받은 이는 닮은 꼴이다.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환경을 선택한 연수와 현재진행형으로 상처를 받고 있는 혜원은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두렵다. 영화가 주목하는 진정 잔혹한 폭력은 육체적인 괴롭힘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믿음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학을 가도 비극은 반복되고 주인공들은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 <이 모든 것을 벗어나기 위하여>는 오프닝의 화면처럼 교내 왕따 문제를 아름다운 화면에 담아낸다. 클로즈업과 포커스 아웃으로 이뤄진 화면들은 화사함 그 자체다. 잔혹한 상황과 예쁜 화면 사이의 온도 차가 상황의 비극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연수와 혜원의 얼굴들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섣불리 결론짓는 대신 머뭇거림으로 기억되는 엔딩이 특히 인상적이다. (송경원, 영화저널리스트)

  • House Hunting House Hunting

    공무원을 준비 중인 재광은 어머니의 부동산중개업을 돕고 있다. 어느 날 예전 여자친구 현경이 방을 구하러 부동산을 찾아오고 재광은 직접 집을 안내한다. 현경이 흑인남자친구 데이빗과 함께 살 집을 구하고 있다는 걸 안 재광은 함께 다니는 게 불편하다. 번번이 집주인과 싸움을 하는 현경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경과 다투기도 <복덕방>은 집 찾기를 통해 한국사회의 단면을 더듬어 가는 영화다. “집 보러 오면 사람들이 대충 어떻게 사는 지 보인다.”는 재광읨 말처럼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기반이다. 영화는 청년들이 몸 누일 좁은 땅덩이도 쉽게 허락지 않는 서울을 무대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마주해야 할 잔인한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돈이 없어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집도 얻기 힘든 현경과 데이빗의 모습에서 한국청년들이 처한 팍팍한 현실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현경과 재광은 한국사회의 압박에 청년들이 반응할 수 있는 두 가지 답을 내놓고 있다. 현경이 한국을 답답해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쪽의 대표라면 재광은 현실에 순응하고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이들의 표상이다. “원하는 게 말고 포기할 게 뭔지 생각해봐. 예전에 살던 그런 집은 이제 못 구해.”는 재광의 푸념에서 ‘집’을 ‘삶’으로 바꿔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것이다. <복덕방>은 과장된 연출 없이 현실의 알레고리를 이야기 안에 녹여 내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인다. 소재를 낭비하거나 청년들의 괴로움을 전시하지 않고 일상의 담담한 풍경을 보여주는, 기본이 탄탄한 영화다. 대상에 신중히 접근하는 태도가 적잖이 믿음직스럽다. 부동산공인중개소가 아니라 복덕방이라는 제목이 그 신중하고 은근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아 더욱 좋다. (송경원, 영화저널리스트)

  • Helper Helper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영화도 언제나 현실을 그 제재로 삼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사실적이든 허구적이든 추상적이든지 하는 차원과 무관하게, 영화가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예컨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다큐멘터리 혹은 먼 미래의 우주의 생명체를 다루는 SF 영화나 빛과 필름/디지털의 관계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실험 영화 등등 모든 영화는 현실의 연장(延長) 혹은 부정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필연적으로 상관적이다. 그렇다면 영화감독이 자신의 영화와 관련해 현실에 보다 더 근접해지려는 욕망을 갖는 것은 본질적인 영역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지지부진한 시나리오 작업에 지친 정우는 자꾸 술에 의존한다. 그런 그에게 지쳐버린 여자친구는 홧김에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다음날, 영화 제작사 친구가 찾아온다. 친구는 시나리오가 더 지체지면, 정우의 제작 순서가 차순위로 밀릴 거라는 비보를 알린다. 그러면서 그는 정우에게 책을 통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문제는 정우의 시나리오가 가출 청소녀 성매매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민 끝에 정우는 여자친구가 이별을 고했던 음습하고 어둑한 골목길에서 지나쳤던 한 소녀를 떠올리고, 소녀와의 인터뷰를 위해 그녀를 찾아 나선다. 소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경찰 배지(badge)를 내세워 소녀와 만난 정우. 하지만 악덕 포주의 잦은 폭력으로 몸이 쇠약해진 소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기절하고, 정우는 소녀를 업고 응급실로 달린다. 그리고 정우는 간호사가 건네는 보호자 동의서에 얼떨결에 사인을 한다. 두 사람은 뒤이어 들어 닥친, 악덕 포주를 피해 정우의 집으로 피신한다. <보호자>는 영화적 현실을 위해, 실제 현존하는 인물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려는 욕망에 관해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의 중심에는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된 정체성으로 위장하고, 자신을 믿고 있는 소녀를 일종의 수단으로 대하는 기만적인 태도가 자리한다. (박준용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By the Lake By the Lake

    어두운 밤, 인적이 드문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한 대가 있다. 차는 이윽고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고 길의 끝에서 캠핑 중인 중년의 부부를 마주한다. 차에 타고 있던 젊은 부부는 어린 딸이 먹을 것을 얻으려 하고, 중년의 부부는 차에서 내려 함께 식사를 하길 권한다. 중년 부부는 오지 캠핑 하는 사람도 찾기 힘들다는 곳까지 찾아온 부부가 의심스럽다. 서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이들의 만남을 통해 긴장감을 자아내던 영화는 젊은 부부의 사연이 드러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물가의 아이>는 경제적인 위기에 내몰린 가족을 통해 상영시간 내내 영화적 긴장감을 증폭시켜 나간다. 일견 미스터리의 구조를 취해 이야기의 반전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는 상황을 지연시키는데 크게 공을 들이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를 데려온 젊은 부부의 사연은 영화 초반부터 짐작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 관객의 위치는 중년 부부와 일치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짐짓 모른 채 하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까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가의 아이>의 극적 긴장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젊은 부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하진 않을지 초조해 하며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는 서스펜스의 능수능란한 활용이라 할 만하다. 우연한 만남은 관객을 예상 못한 지점으로 안내하고 내내 감돌던 불안은 어느새 현실이 된다.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놓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확장해가는 솜씨가 놀랍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것보다 얼마나 큰 효과를 자아내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영리한 영화다.(송경원, 영화저널리스트)

  • Pollock Pollock

    조선족 청년 김수는 택배 배달을 하던 중 어떤 한 남자와 충돌 사고를 일으키고 경찰서에 가게 된다. 사람을 쳤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던 김수에겐 천만 다행으로, 그 남자가 마침 경찰이 찾고 있던 범죄인이었고, 경찰로부터 자신이 곧 거액의 포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김수는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자신의 한국어교실의 같은 반 친구들을 모두 초대하여 밥을 사려고 한다. 김수의 계획은 단순히 밥을 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함께 살고 있는 또 다른 조선족 친구 우진이 다니는 중국집을 통째로 빌려 그들에게 ‘연길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우진의 말대로 “얼마 만나지도 않은, 안 친한” 동료들일 뿐인데, 이들에게 김수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접하려는 듯 성심성의껏 시장을 봐오고, 요리를 준비한다. 영화엔 연길식 고기채, 고치순대, 콩나물명태찜 등의 요리가 만들어지고, 또 대접되는 과정이 매우 친절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흥미롭게도 음식에의 집중도를 높인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이어 생각지도 못하게 김수가 손수 만든 연길 요리를 대접받게 된 한국어교실 동료들이 갖게 되는 놀라움과 마찬가지로, 관객들 역시 조선족 이야기를 다룬 수없이 많은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그것과 달리, 조선족이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는 이 영화의 참신함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의 감동은 연길 요리를 손수 대접하는 김수를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구도자의 모습처럼 보여준다는 데에서 나온다. 포상금 소식에 기분이 좋아진 김수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한국어교실의 친구들에게 연길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었다는 점과, 포상금이 없던 일로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날 준비한 요리의 하이라이트인 ‘콩나물명태찜’을 들고 나가 즐거운 얼굴로 설명하던 김수의 해맑은 얼굴이 주는 감동은 상당하다. 이 청년의 한국 정착이 과연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를 걱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행복한 얼굴로 있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박준용 /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Camellias in bloom Camellias in bloom

    중년의 주인공 연화는 혼자 살던 이모의 부음을 듣고, 아버지를 모시고 지방의 한 장례식장으로 내려간다. 이모의 유품을 정리하던 연화는 이모의 낡은 휴대폰 속에서 특별한 동영상을 보게 된다. 연화에겐 특별한 어떤 감정이 솟아난다. ‘이모’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연화와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연화의 회상 속에서 드러난다. 이모는 뇌졸중 환자인 연화의 어머니(즉, 이모의 언니)를 마지막까지 뒷바라지했으며, 연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홀로 살다가 잠을 자던 중 세상을 떠났다. 연화의 아버지에 따르면 “(기껏) 틀니 하나 해줬더니 (...) 그걸 해 끼고 달라당 도망간” “도둑년”이고, “환갑도 지나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남자 만나 살았던 “미친년”이다. ‘서방’도 ‘자식’도 없다는 이유로 이모를 ‘무연고자’로 처리해 버리는 아버지의 편하기 그지없는 일처리 와중에, 연화는 이모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모의 유품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연화는 자신이 사드렸던 이모의 빨간색 오리털 점퍼를 보고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하얀 바지에 빨간색 혈흔이 마치 꽃무늬처럼 묻어났던 과거의 어느 날의 기억. 그리고 그 점퍼를 입고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뽐내던 이모의 해맑은 얼굴. 연화의 거실을 장식한 빨갛게 피어난 동백꽃. 연화는 이모의 점퍼를 입는다. 그리고 이모가 남긴 동영상을 본다. 단조롭고 거무튀튀하며 먼지 쌓인 방충망에 가려져 있던 연화의 일상에 이모의 뜨거웠던 삶의 한 순간의 여파가 서서히 스며든다. 연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박준용 /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The Hunt The Hunt

    <더 헌트>는 길거리의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희순할매의 동네에 부안할매가 새로 이사 오며 겪게 되는 그들의 폐지 쟁탈전을 그리고 있다. 카메라는, 계단이건 오르막길이건 오르고 뛰는 두 할머니의 고된 육체를 따라가지만 여기서 중점을 두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의 감각이라기보다는 경쟁자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막중한 압박에 쫓기면서 만들어지는 그들 간의 심리적인 대립구도이다. 따라서 영화는 다소 무겁고 감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소재임에도 시종일관 쾌활한 분위기를 잃지 않은 채 두 할머니의 대결을 리드미컬하게 담아낸다. 타악기가 주도하는 배경음악과 함께 길거리를 뛰며 폐지를 먼저 손에 넣기 위한 할머니들의 여정과 사투는 흡사 만화와 같이 연출되었는데, 이는 그들의 대결을 사회적인 계급이나 생물학적인 연령대에서 멀리 떨어뜨려놓는다. 두 할머니는, 소외된 계층에 대한 우리의 전형적인 반응이라 할 연민과 동정에서 벗어난 채 내러티브 안에서 하나의 목적을 위한 캐릭터로 기능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오매불망 박스를 기다리던 두 할머니를 앞에 두고 떠나가는 트럭을 향해 돌덩이를 집어던지고 줄행랑을 치는 희순할매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코믹만화 속 캐릭터와 닮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두 노인의 신체적인 구체성, 사회적인 특수성이 보편적인 의례와 관습으로 구성된 장르영화와 충돌하는 지점을 미묘하게 건드리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며 사회적 현실 앞에서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 속에서 웃고 즐기면 되는 것일까? <더 헌트>는 아주 단순한 내러티브를 통해, 그 간극을 오고 가며 그를 중재하고 조절하는 영화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민호, 영화연구자)

  • Dahee Dies Dahee Dies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오늘날 사회적 재난으로까지 평가되는 경제위기와 청년실업 문제를 판타지 형식을 통해 풍자한다. 옥상에서 떨어진 토익 책에 맞아 죽는 웃지 못 할 사고로 목숨을 잃고, 저승에 가서도 천국의 문을 뚫기 위해 지역구 인턴 과정을 밟아야하는 ‘다희’가 처한 상황은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기에 관객으로부터 일면 공감을 자아내며, 일면으로는 비참하게 다가온다. 다희라는 청년의 죽음, 그리고 젊은 인재들이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406.6:1의 경쟁률을 극복해야하는 사회적 비극은 밝은 색감의 미쟝센, 배우들의 연극적 연기, 그리고 실감나는 회사생활의 묘사를 통해 발랄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이내 이 상황들은 다희가 살아왔던 이승의 사건과 복잡하게 얽히고, 그녀의 죽음을 유발한 원인이 토익 책이 아닌, 또 다른 청년과 관련된 어떠한 우연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비극을 향해 굴절된다. 한편 저승으로 건너간 인물들이 먹는 ‘사과’는 매우 직설적인 형태의 언어유희이자 상징물이다. 비극적인 상황에 빠진 인물들은 말 그대로 서로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사과를 먹는다. 이처럼 단순한 언어적 유희가 그저 유치한 말장난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는 개인적인 능력만으로는 사회적 현실을 개선해 나갈 수 없는 젊은 세대의 무력함 속에서, 불안한 현실과 절망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서로를 향한 위로뿐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블랙코미디의 모범적인 작법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장치는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고 풍자함으로써 동시대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김고운,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Mongrels Mongrels

    <누렁이들>은 선의의 양면성과 도덕의 모호성을 복잡하게 얽어낸다. 동물보호단체에서 근무하는 ‘나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 문제를 관객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나운이 근무하는 단체는 단연 ‘동물’의 생명권을 보장하고, 그들이 사람에게 유기되거나 학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존립하는 곳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곳이기에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상이 충돌하는 배경이 된다. 이와 같은 갈등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는 공간은 인간에게 방치되고 있는 누렁이들의 집으로서, 단체 대표와 나운의 생명권에 대한 잣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자 양자 간의 이해관계가 가장 극렬하게 다투는 곳이다. 한편으로 나운은 이 공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사회적 치안을 유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법적 제도와 맞서기도 한다. 다소 충격적인 결말과 그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등장이 반가운 것은 우선 다양한 종(種)의 동물들이 인간의 반려동물로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동물들의 생명권을 보장해야한다는 의식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 대한 실태를 보여주고, 반려동물의 문제를 넘어서 이것이 곧 환경문제와 관련된 의식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는 점이다. ‘동물의 문제 해결은 곧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는 취지의 말이 나운의 대사를 통해 곧바로 전달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보다 더 놀라운 것은 동물보호단체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들을 경유하여, 결과적으로는 사람들 간에 발생하는 도덕 및 법적 절차의 범주에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감독의 통찰력이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대사를 통해 발화된 내용을 내러티브 전체로 확장하고, 나아가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선의와 치안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었다는 것에 영화적 의의가 있다.(김고운,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The Line The Line

    한 여인이 고심이 가득한 얼굴로 옥탑방 옥상에서 담배를 입에 문다. 무언의 결단이라도 한 듯한 비장한 표정의 그녀 앞에는 우중충한 도심의 잿빛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녀는 이윽고 방 안을 샅샅이 청소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살아온 흔적이라 할 물건들은 단호하게 버려지고 방은 차차 텅 비워진다. 현관문의 문턱을 있는 힘껏 닦고 문지르는 그녀의 손놀림과 함께 영화는 이 방의 과거로 돌아간다. 7년간 이곳에 살던 한씨는, 최근 들어 집세를 제때에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영화의 처음에 등장한 집주인 정씨는 그를 독촉하기 위해 방을 찾지만 밀린 월세를 근시일 안에 해결하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간다. 하지만 궁핍한 삶과 고된 노동으로 병약해져가는 한씨는 종종 길에서 쓰러지고, 결국 자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 채 현관 문턱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결의에 찬 듯 빠르게 움직이는 정씨의 손놀림은, 바로 그 죽음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영화는, 문턱을 닦는 마찰 소리와 함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다가 정씨가 한씨의 시신을 발견한 후 그를 문턱에서 마당으로 끌어내는 순간 다시 한 번 한씨가 죽던 그 순간을 플래시백으로 삽입한다. 한밤중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그의 신체가 쓰러져있던 바로 그 자리의 흔적은 이제 지워진다. 버려질 그의 물건들이 담긴 비닐봉투가 방바닥으로 고꾸라질 때 그 사소한 운동감은, 이 공간을 점유해온 한씨의 고유성과 그 흔적을 말없이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는 한 공간에 거주한 그 인간의 개별성마저도 손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어떤 흔적과 자취를 찾고자 하는 영화이다. 플래시백 속의 플래시백으로 강조된 한씨의 주검과 그 자리의 고유성은, 그 방을 새로이 세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 이후에도 문턱을 닦는 소리로 여전히 잔존한다. 그런 점에서 검은 화면의 엔드 크래딧과 함께 들리는 이 소음은, 적대적으로 구성된 세계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이민호, 영화연구자)

  • Hidden Road Hidden Road

    남자가 할 수 있고 여자는 못한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 유리천장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가리워진 길>은 직장에서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불평등과 부조리를 그린다. 민정은 공들여 준비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업무에 매진한다. 하지만 부장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믿지 않고 급기야 대리에게 프로젝트를 넘기라고 강요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장기 프로젝트를 임신한 여성에게 맡길 순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내 해야 할 직장 내 불평등을 과장되지 않은 시선으로 풀어간다. 당연한 권리이자 축복을 직장과 가정이란 양자택일의 선택으로 몰아붙이는 직장 내 풍경에서 당연한 듯 퍼져 있는 우리 사회 내 부조리를 대면할 수 있다. 특히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이라는 <가리워진 길>의 가사를 중의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 감독의 재치를 읽을 수 있는 지점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눈물짓는 민정이 울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차근차근 진행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강하게 호소하거나 변화를 외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다녀야 하는, 다닐 수밖에 없는 직장여성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 자극적인 사건을 만들어 폭발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도드라진 미덕인 것 같다. 물속에 서서히 잠겨 가라앉듯 불편한 분위기를 쌓아나가는 솜씨가 오히려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현실을 담담하게 관찰한 끝에 얼룩 같은 오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송경원, 영화저널리스트)

사랑에관한짧은필름

  • Hye-Young Hye-Young

    <혜영>의 오프닝 시퀀스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두 남자의 이미지, 일본 고성의 사진과 그림, 지면에서 높이 올려다 본 십자가의 앙각 쇼트(이는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기입된다), 그리고 한 여성을 찍은 영상이 마치 콜라주처럼 재생되는데, 이 여성의 얼굴은 거칠게 도려내져 있다. 이 시퀀스가 무슨 의미인지는 영화를 끝까지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영화의 본편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혜영, 성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1부이다. 서울에서 교사로 일하는 여성 ‘혜영’과 대구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하는 남성 ‘성우’는 오래된 연인이다. 혜영이 대구에 내려와 성우의 집에 머무르던 며칠 간, 그들은 오직 둘 만이 이해할 것 같은 이상한 놀이들을 펼친다. 여러 가지 독립적 에피소드들이 병렬적으로 펼쳐지며, 수시로 사용되는 점프컷은 코믹한 효과를 강화한다. 이들의 놀이는 마치 콩트 같아서, 1부는 감독의 오래 전 작품인 <가족오락관>의 연인 버전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들이 벌이는 그 모든 놀이들에 불안감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과장된 놀이는 연인 사이의 권태와 불신이 독특한 방식으로 굴절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었을까. ‘성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2부가 되면, 이제 혜영은 성우의 삶에서 사라진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이별 순간과 그 정황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성우의 삶 속에 남아있는 혜영의 흔적들, 그녀가 사라진 후 남은 공백의 크기를 차분히 응시할 뿐이다. 가령 성우는 왜 혼자 노래방에 가서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오열하듯 열창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후에 나오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1부에서 혜영이 장난스럽게 성우를 씻기던 장면 직후의 상황으로 추측되는, 그러나 1부에서는 생략되었고 2부에서는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장면이다. 즉 두 사람이 포옹한 채 혜영이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흥얼거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이와 비슷한 것이 1부에서 생략됐지만 3부에서 길을 잃은 기억의 파편처럼 등장하는, 혜영이 서울에 올라갈 때 코 골며 자던 성우가 갑자기 일어나 배웅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내러티브 구조상 늦게 도착한 셈인데, 이는 그들의 사랑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감각을 강화한다. 영화에서 수차례 등장하던 일본의 고성은 ‘구마모토성’이라는 곳으로, 혜영이 성우와 함께 꼭 가보고 싶어했지만 결국 함께 가지 못한 곳이다. 그곳은 강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고, 그 파괴를 기록한 사진이미지는 성우와 혜영의 사랑이 끝났음을 증언하는 기록처럼 남는다. <혜영>은 일견 장난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과 이별의 씁쓸한 정취를 내밀하게 담고 있는 영화다. (박영석,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Agreement Agreement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며 늦을 것 같다고 얘기하는 세영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엿본다. 곧이어 ‘한번 면회 가면 어떨까?’는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는 모습에서 그 불안감은 더욱 짙어진다. 합의서를 받아오라며 몇 가지 팁을 알려주는 변호사의 말대로 화장마저 지우고 만난, 당당하고 세련된 삶을 보여주는 혜연 앞에서 세연은 열린 백의 지퍼를 받아버린다. 과연 세영은 혜연에게서 합의서를 받아 낼 수 있을까? ‘강간’혐의로 구금된 남편을 위해 피해자 ‘혜연’으로부터 합의서를 받으려는 여인의 한나절을 스크린에 담아놓은 작품이다. 극중 변호사의 조언을 들으며 한숨이 나오는 것은 비단 주인공뿐 아닐 것이다. 작품을 보며 나 또한 스크린을 향해 한마디 해주고 싶고,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것은 그만큼 작품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마지막 자막을 보며 관객들은 세영의 입장에서 또 혜연의 입장에서, 두 여인이 맞닥뜨린 현실을 이겨 한 단계 성장할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을 떠나서. 이태진 감독은 이전에 <그 남자 그 여자 이야기>라는 짧은 작품으로 절망과 희망, 희망과 절망 사이에 선 두 남녀의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줬다. 또한 성희롱당한 노래방 도우미의 하룻밤을 이야기 한 2013년 작 <보통하루>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불합리성을 들려줬다. 특히 이 작품은 경찰청인권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묘한 심리와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스크린에 옮겨가며 연출자 자신의 성장처럼 작품의 깊이와 이를 표현하는 내공이 한층 성장해가고 있음을 이번 작품들을 통해 또한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

  • Joowoo and Hanbyeol Joowoo and Hanbyeol

    이 영화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학을 졸업한 한별은 취업을 위해 모의 면접을 본다. 하지만 모의 면접관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한별의 얼굴은 어두워져 간다. 휴학 기간 동안 알바를 했다는 한별에게 면접관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하고, 알바 때문에 토익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한별에게 면접관은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결국 한별은 모의 면접을 중단한다. 한별이 겪은 이러한 일을 관객이 알게 되는 것은 고등학생 주우를 통해서이다. 정확히 말하면 주우가 훔친 한별의 휴대폰 속 영상을 통해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각적이고 서사적적인 측면 모두에서 액자식 구조가 된다. 이 영화의 액자식 구조는 주우와 한별이 같은 시공간에 공존하게 만들고, 관객에게는 주우의 삶과 한별의 삶을 동시에 관찰하는 시선의 위치를 제공한다. 외견상 두 사람은 같은 패턴의 암호를 사용하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주우가 동영상 속 한별의 삶을 추적하면서 둘 사이에 숨어있던 공통지대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과 조우하면서 특수한 두 사람의 공통점이 아닌 시대의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훔친 휴대폰을 팔아 생활하는 고등학생 주우의 삶과 한별이 겪은 현실을 동시에 관찰하는 전지적 시점에 있는 관객에게 한별의 삶은 곧 주우의 현재이자 미래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우는 말이 없다. 우리는 주우가 처한 외적 상황은 볼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주우가 한별에게 호의의 감정을 갖게 되었고 어쩌면 휴대폰을 되돌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그가 한별의 휴대폰에 칩을 다시 꽂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관객의 마음속에 그리고 어쩌면 주우의 내면에도 싹텄을 작은 가능성이 깨지고 만다. 어떤 가능성도 허락되지 않는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쪽도 저쪽도 향하지 못한 채 멈춘 주우의 발걸음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성진수, 영화평론가)

  • The Distance between Us The Distance between Us

    “지금도 규칙은 그대로 있어요.“ ”지금은 그렇게 안 심하다니까요.“ 도대체 무슨 규칙을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는 현재의 인터뷰와 과거의 일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윤리거리규칙’때문에 벌어졌던 사건을 그린다. 윤리거리규칙이란 여학생과 남학생은 50센티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다. 좋아 하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법. 하지만 이 법칙이 서현과 병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학교의 윤리거리규칙은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더니 서현과 병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환경 속에서 경쟁의 가치를 교육 받는 한국 청소년들은 미성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른들에게 순종을 요구받기도 한다. “미성년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른들이 책임져 줘야죠”라고 말하며 윤리거리규칙을 옹호하는 서현의 엄마처럼, 어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아이들에게 폭압을 행사할 권리와 혼동한다. 윤리거리규칙을 어겨서 세 차례의 경고를 받은 서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반복한다. 서현의 자포자기적인 외침은, 응분 받아야할 보호와 보살핌이 권위적인 억압의 형태로 왜곡되는 사회를 사는 청소년들의 심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처럼 영화에서도, 누군가가 권위라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기로 결심한다. 비록 그것이 깨질지라도 말이다. 이 영화가 인물들을 인터뷰하며 서로 다른 입장을 듣고 보여주는 카메라는 상당히 객관적이다. 외견상 보이는 이러한 객관성은 영화 속 사태를 흑백 논리로 재단하지 않도록 경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선영, 병찬, 민주의 독립적이고 특수한 경험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는 약화되는데 이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성진수, 영화평론가)

  • Three room Three room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미루어 충분히 짐작이 가는 가족이 집을 보러 복덕방에 나타난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아빠 춘식, 큰딸 명화와 작은 딸 명선은 퇴락해 보이는 작은 복덕방에 찾아와 안내를 받는다. 적은 돈으로 방을 구하려 경기도의 어느 마을로 찾아온 이들은 집을 보며 훈훈해 보이지만 결국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다. 그나마 번듯한 집을 안내 받지만 이들에겐 조건이 여의치 않다. 하지만 곤궁해진 살림에도 외제차를 놓지 못하는 춘식은 서울로 출퇴근해야하는 딸들에게 여전히 큰소리를 치고, 수입이 변변찮은 명화나 어머니와 헤어져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는 명선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비싼 월세도 이들의 선택을 가로막아 다른 집을 보려하는데, 이때 갑자기 차를 두고 걸어 가보자고 제안하는 춘식. 무더운 여름날 걸어서 집을 찾기 시작한 이 가족은 과연 이사 갈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이 작품 속 가족이 새로 이사 가려는 마을은 큰 광풍이 지나갔던 곳이다. 균열과 다툼으로 구성원 간에 상처를 입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고 서로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모습을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곳은 여럿 존재한다. 제주도 강정마을, 밀양, 그리고 성주가 그 곳이며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처럼 스크린에 등장하는 가족이,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보듬어 치유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픈 것이 감독의 의도 아니었을까? 이나연 감독의 전작 <못, 함께하는>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신의 가족 모습을 담은 사적 다큐멘터리다. 이번 <쓰리룸>에 투영된 가족의 모습 또한 극영화로 옮겨 놓은 자신의 가족 모습은 아닐까? 떨어져 지내면 그립고, 함께 마주하면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족의 진짜 모습은 아닐까? 전작을 봤던 관객이라면, 아니 처음 보는 관객이더라도 이 가족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볼 수 있기를 바래봄은 평론가의 지나친 욕심일까? 나는 감독과 함께 흐뭇한 시선으로 관객들을 바라보고 싶다, 그러고 나서 함께 소주 한 잔! (정지욱, 영화평론가)

  • Trivial Matters Trivial Matters

    단편영화계에서 영화감독의 창작의 고통과 생활고를 이야기하는 자기반영적 영화는 꽤 많다. 이런 영화는 대개 사회 시스템 내부로 온전히 진입하지 못하는 청년들과 관련된 사회 문제 일반으로 확장하거나, 혹은 창작자의 자의식 내부로 깊이 침잠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그 어떤 방향도 취하지 않고 이런 소재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밝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신선한 분위기는 영화감독 지망생인 ‘도환’ 캐릭터로부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간 주로 묵직하고 남성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배우 엄태구의 이미지와 다소 어리숙하며 순진한 도환의 성격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감각은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도환은 짧은 사랑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를 힘겹게 쓰고 있다. 아마도 옛사랑의 추억과 작품을 연동시키려 하는 것 같지만 쉽지가 않다. 그가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일상에 들어온 여성 ‘은하’ 덕분이다. 도환이 자기 동네 거리에서 처음 은하를 발견할 때,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 아래 선 그녀의 이미지에 강렬한 매혹을 느끼고 사진을 찍어 그 순간을 포획한다. 그 이후 도환은 적극적으로 마음의 신호를 보내는 은하를 경계하고 벽을 쌓으려 하지만, 그것은 금세 허물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둘 사이의 감정이 오가는 통로가 스마트폰과 화상통화라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라는 것이다. 무제한 통화가 가능한 스마트폰 화상통화를 통해 <8월의 크리스마스>를 같이 관람하는 순간은 영화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은하는 영화를 보지만, 도환은 영화 이미지 속 심은하와 현실의 은하를 동시에 본다. ‘은하’는 도환에게 영화적 이미지로서의 이상향인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여배우 심은하를 대체하는 상징적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은하라는 여성의 출현은 어쩌면 매일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던 도환의 판타지의 실현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이성 캐릭터를 현실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라는 영화감독의 행복한 판타지. 이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이 영화는 결국 도환의 시점에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석,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Mac-boogie Mac-boogie

    평범한 농촌 가족의 엄마 효선은 남편 정만은 물론 딸 진숙과 아들 진수에게 치여 고달픈 여름을 보낸다. ‘왜 이리 더운 거지?’ 덜덜거리는 선풍기에 투정하는 진숙의 잔소리에 잠도 편히 못자고, 건넛방 진수는 게임을 하는지 늦도록 방에 불이 켜져 있다. “소가 새끼 낳는 기계입니꺼? 늙으면 맛도 없고, 소도 아닙니꺼?” 병원에 가보니 ‘조기 폐경’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치료가 가능하지만 거금이 필요하다는데, 때맞춰 진수는 ‘맥북’을 사달라고 조른다. 지금 집에서 현금 융통이 가능한건 외양간의 암소 한 마리를 내다 파는 것 뿐. 그러나 나이들어 새끼도 낳지 못하는 암소는 헐값이라는 소리만 듣는다. 짐승도 오래 살면 주인을 닮아간다더니, 어쩜 지금 효선과 암소가 이리도 닮았을꼬?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어머니의 희생이 담긴 작품이다. 모진 희생을 슬프거나 분노하게 그려내기 보다는 한숨과 폭소를 유발하는 유머로 부드럽게 들려준다. 그렇다고 어머니나 가족들을 폄훼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가족 안에 계신 어머니의 모습과 철없는 가족들을 함께 등장시켜 재미나게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 작품은 대구다양성지원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배경인 농촌이라는 지역적 특색이 화면에 잘 묻어나고, 지방 농촌가정의 알콩 달콩 에피소드가 흠뻑 묻어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을 통해 대구지역 독립영화의 활성화를 작게나마 소망해 본다. ‘뭐든 원하면 다 사주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작품을 보고난 뒤 어머니께 ‘장맛비에 건강 챙기셔요’라는 카톡이라도 드린다면 당신은 정유년 최고의 효자효녀에 등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리 된다면 장병기 감독은 “거봐, 맥북이면 다 된다고 했잖아”라고 소리치며, 어깨춤을 덩실 덩실 출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한 모든 관객들은 영화제에서 어깨춤을 추는 감독의 모습을 보고 싶다. (정지욱, 영화평론가)

  • A Letter from the Heart A Letter from the Heart

    랩 하는 군인 도우는 관심병사다. 그는 늘 누군가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도우는 부대 밖의 한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현주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도우의 소문을 들은 현주는 그에게 거리를 둔다. 동료들과 장기자랑을 준비하던 중 도우는 현주에게 노래로 마음을 고백하는데, 현주의 대답은 미안하다이다. 그날 저녁, 도우가 사라진다. 군대, 그 중에서도 관심병사를 소재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소재의 무거움과는 달리 편안하고 명쾌하다. 그것은 랩 이라는 수단 때문이다. 관심병사와 드림캠프를 자막으로 소개하는 도입부에 동반되는 사운드, 즉 총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소리, 새소리, 힙합 비트의 어우러짐은 자막의 진지한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도우의 랩으로 전달되는데, 랩은 대사라는 표현수단만큼 직접적이지만 그 메시지가 대사로 전달되었을 때 예상되는 과잉과 인위적 분위기를 피하면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랩에 의한 장점이 있는 반면 관심병사 도우의 동반적 시점에 지배되면서 이야기가 한 인물의 주관성에 지나치게 치우쳐 전개되는 점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는 주변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만들면서 관객이 한 인물에게 동화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표현 형식면에서는 연기가 어색한 순간들 편집 리듬이 매끄럽게 못한 순간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형식적 어색함과 낯섦은 이 영화가 재현하는 내용과 가장 잘 맞는 형식이 아닌가, 재고하게 된다. 결국 문제는 소통이다. 소통에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의 낯선 말들, 타자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화 속 도우의 랩은 그 타자의 언어 위치에 있다. 영화는 바로 이 타자의 말이 익숙한 우리의 말보다 더 진실 될 수 있고 그래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항변하는 셈이다. 도우가 봉사하는 기관 사람들은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한다. 모두 익숙하게 사용하는 이 인사말이 일상의 상투어로서 그 본래 의미를 잃은 말이라면, 낯선 도우의 랩, 즉 타자의 말은 도우의 진심을 담은 ‘마음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성진수, 영화평론가)

  • Different, Night Different, Night

    영화의 첫 장면, 고정된 카메라가 사뭇 무심하게 모텔 방을 비추고 있다. 한 여성이 방구석의 작은 의자에 앉아 가발을 벗는다. 그녀의 표정과 동작들 하나하나가 반복적인 일상인 것처럼 무감각해 보인다. 그녀는 조건 만남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 ‘서연’이다. 그리고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온 ‘종수’라는 남성이 나타난다. 종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다가 우연히 서연을 만나게 된 것이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교감을 통해 외로움을 더는 일인 것 같다. 이것은 확증이 아니라 추정인데, 왜냐하면 영화는 첫 장면을 갑자기 중단시키고 곧바로 밤거리를 비추는 야외 장면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생략 탓에 영화 전체가 성립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첫 만남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후 종수의 반복적인 주장과 서연의 반응에 따라 그것을 추측할 뿐이다. 둘 사이에는 과연 인간적인 교감이 있었을까? 이후 영화는 어떻게든 서연을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종수와 그를 피하려는 서연, 그리고 둘 사이를 가로막는 남성 ‘강혁’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따라간다. 이채로운 것은 조건 만남 집단을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강혁이 의외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강혁은 으레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행사할 법한 폭력을 가하는 대신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종수를 설득하려 한다. 이 때문에 이 영화에는 극적 상황이 고조되며 발생하는 긴장과 대화를 통해 발생하는 심리적 격정이 뒤엉키는 독특한 서스펜스가 있다. 종수는 서연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고 반복해서 호소한다. 자기가 느낀 인간적인 감정 교류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결국 그토록 원하던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 종수는 서연의 말에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그녀의 말만으로 둘 사이에 오간 감정을 단정하긴 어렵다. 종수는 남겨진 서연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것을 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첫 번째 모텔 장면과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준 후(서연은 여전히 무감각한 태도로 일을 한다), 서연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밤이 깊을 대로 깊은 무렵, 수많은 인간들의 욕망이 넘쳐흐르던 유흥가의 밤도 지나가고 이제 거리에는 쓸쓸한 공허만이 남아있다. 조건 만남을 하는 집단의 동료들은 모두 차안에서 지쳐 잠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울음을 참고 있는 서연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에는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바람과 네온사인 빛이 맺힌다. 그 얼굴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잔상을 남긴다. 보여진 것들과 말해진 것들, 그 간극에서 진실한 감정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박영석,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Home without me Home without me

    엄마가 입어라 해서 입는 것이지만, 언니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가는 나는 선영언니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자랑스럽고 좋다. 예쁘고 똑똑하고, 학교에서 인기도 많은 더욱이 걸스카우트인 언니는 우리 집 자랑이다. 다만 내게 무섭고, 모든 것이 언니 위주인 집안 분위기는 아쉽지만 그래도 우리 언니가 최고다. 세영이에게 선영언니는 무섭고 엄하지만 최고로 따라가고픈 언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비로소 걸스카우트가 되면 선영언니처럼 더 멋진 여학생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언니에겐 모든걸 다 시켜주고 사주시며 받아주시는 엄마 아빠가 세영에겐 관심도 없는 것 같다. 하루 하루 생활에 바쁘다 보니 선영에게 세영이를 맡기고 종일 밖에서 일하느라 집에오면 그저 쉬고 싶을 뿐이다. 세영의 마음도 알아주지 못하고. 세영이는 걸스카우트가 되어 언니 선영처럼 멋진 여학생이 될 수 있을까? 영화를 지켜보는 동안 관객들 마음 한구석은 짠하게 아려 온다. 출근과 등교를 앞두고 바쁜 아침, 우유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는 엄마 옆에서 아침밥을 챙겨먹는 세영을 보면, 토닥여주며 ‘에구 예쁜 내 새끼’를 연발하고 싶어진다. 김민서양의 세영 연기는 풍부한 표정과 살아있는 액팅으로 극의 전부를 완벽하게 이끌어간다. 수업시간 교실에서, 공기를 잘하는 친구에 대한 부러운 시선이나 활짝 웃는 모습, 걸스카우트에 대한 희망, 언니에게 잔소릴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어보이는 새침한 얼굴, 엄마 앞에서 울먹이는 모습을 보며 짠한 마음에 눈물 닦아주며 힘껏 안아주고 싶어지는 것은 내가 눈물샘이 많아지는 지천명에 이른 아저씨기 때문만은 아닐 터. 김현정 감독은 전작 <은하비디오>에서 보여주듯 과거의 어느 순간, 추억들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것이 매우 탁월하다. 누구에게나 가슴 한 구석에 아린 기억으로 남을 만한 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웃픈 추억으로 툴툴 털어버리면서 기억할 수 있는 일들을 스크린에 담아내며 관객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이에 안성맞춤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그리고 탁월한 연출력에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품들을 기대해봄 직하다. (정지욱, 영화평론가)

  • Atonement Atonement

    진수는 엄마가 끓여주는 곰국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그 곰국을 함께 먹은 날 진수는 머뭇거리는 친구의 손을 이끌고 교회로 향했고 그 친구는 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이후로 곰국은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과 친구의 죽음에 본인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진수에게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두 명의 청소년이 겪는 슬픔, 죄책감, 두려움, 갈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주변의 어른들이 두 소년을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만 대하면서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해가는 동안, 두 소년은 온전히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리고 10대의 미숙하고 섣부른 판단에 기대어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서적 보살핌의 결여 속에서 소년들 앞에 펼쳐지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의 상황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 영화 속 곰국은 주인공 소년의 아픈 기억이지만 동시에 어른들의 무관심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사고 전과 사고 후를 컬러와 흑백으로 구분하는데, 단순해 보이는 이 이분법적 표현 수단은 사고를 겪은 이후 소년들의 혼란스런 내적 상황을 설명하는데 꽤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반면 증폭되는 소년들의 갈등과 곰국이라는 매개를 이용한 드라마의 전개가 다소 평면적인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성진수, 영화평론가)

  • 2nights 3days 2nights 3days

    <2박3일>은 두 커플의 이별을 보여준다. 먼저 20대 젊은 커플이 있다. ‘지은’은 연애 2주년을 맞아 남자친구 ‘민규’의 집에 간다. 선물을 담은 쇼핑백을 들고 가는 지은의 표정은 설렘을 담고 있는지 무덤덤한지 알쏭달쏭한데, 적어도 남자친구의 집에 가는 게 일상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민규의 가족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은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편해 하는 것은 민규 본인이다. 2년간의 연애로 서로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이지만, 한 사람은 그 익숙함이 편안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익숙함이 지겹다. 또 하나의 커플은 민규의 부모님이다. 민규 엄마는 새로운 남자가 생겨 집을 나갔다가 어느 날에는 몰래 집에 들어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다가 아빠에게 들킨다. 다른 연령대의 두 커플의 이별을 겹쳐놓은 이 영화의 상황 설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런데 각각의 인물들이 발산하는 감정과 그것이 충돌하는 양상에는 약간의 멜로드라마적 과잉이 있다. 특히 민규의 행동과 그의 감정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규라는 캐릭터가 그처럼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 설정된 것은 이 영화 전체가 지은의 시점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감정의 결에 세밀함이 부족한 것은 다소 아쉽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쌓여오던 과잉에 가까운 긴장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민규 가족의 회의 장면으로 이어져 폭발하며, 이는 지은의 내면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이 영화에는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관계의 쌍은 사랑하고 이별하는 사람들에 대해 좀 더 보편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의 감정은 더불어 나누는 것이지만, 이별은 이처럼 일방적일 수 있다는 것. 두 사람의 사랑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예측 불가능한 감정으로 변해갈 때,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사랑이 끝나고 이별이 찾아오는 데에는 어떠한 예고도 기약도 없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청년층이든 장년층이든 다르지 않다는 것. 즉 삶의 어떤 단계에서든 이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것. (박영석, 미쟝센 프로그램 위원)

  • My Chemical Love My Chemical Love

    로맨스는 우리에게 해피엔딩을 기대하게 한다. 로맨스란 두 사람이 그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를 넘어 결국 사랑을 이어나가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맨스 서사의 차이는 결말 보다 과정에 기인한다. 계급 차이, 가족의 반대, 사랑을 깨닫는 타이밍의 어긋남 등, 영화마다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장애요인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서로 다른 로맨스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영화들이 비슷해 보인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 속 장애들이 결국은 ‘현실’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마이 케미컬 러브>는 바로 이 현실이라는 장애물을 만난 젊은 연인의 이야기이다. 적은 수강생, 단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배우생활, 환경 좋은 남자와 결혼하라는 부모의 성화 등, 자신들의 목표와 주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들의 현실이 사랑을 삐걱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속 연인인 선주와 윤기는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에 맞서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현실의 장애를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인상적인 좀비 판타지로 시작해서 흔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머물고 마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에 기대지 않고도 인물의 감정과 역사를 촘촘하게 전달하는 시나리오와 연출은 이 영화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게 만드는 장점이다. (성진수, 영화평론가)

희극지왕

  • Deep in the heart of the mountain Deep in the heart of the mountain

    재선을 꿈꾸는 야심 넘치는 군수 상식과 그의 똘마니 지원은 사냥을 하러 첩첩산중에 오른다. 첫 번째 사격에서 큰 동물을 사냥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그들은 공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아웅다웅하며 목표물을 확인하러 간다. 이내 자신들이 사람을 쐈다는 것을 확인한 상식과 지원은 1초만에 말을 바꾸며 서로의 탓을 한다. 이때 갑작스레 무리에 합류하게 되는 대머리 역시 자신이 사냥했다고 생각한 동물이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는 순간적으로 말을 바꾸며 상식과 지원을 경찰에 신고하려고까지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셋의 일이 되는 이 순간,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백순규의 <첩첩산중>에는 이와 같은 선택의 기회와 말바꿈의 순간들이 깨알같이 심어져 있다. 그것들은 너무 사소해서 웅얼거림 만으로도 금새 결정되는 동시에 소급적으로 보면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첩첩산중>은 인간의 욕심과 비겁함을 희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다. 세 사람은, 아니 어쩌면 죽은 척을 하고 세 사람의 작당모의를 엿들으며 도망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윤사장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은, 고립된 공간 안에서 인생이 걸린 도박을,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 벌인다. 산 속이라는 고립된 공간은 이들이 스스로의 인성을 바닥까지 남김없이 드러내어 보이도록 하는 데에 일조를 하고, 세속적인 현실감각과 끈덕지게 엉켜있는 도박은 그들이 드러낸 그 바닥을 통해 더더욱 과감해진다. 결국 네 사람 모두는 처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영화가 이 ‘첩첩산중’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준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축소판을 희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은 산 속에 고립되어 있지 않아도 인성의 바닥을 쉬이 드러내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우리네 현실 때문은 아닐까. (한상희, 영화연구자)

  • The Fury of Twilight The Fury of Twilight

    세운상가 한 구석, 노인 이판국은 비밀스럽게 사제 폭탄을 만들어 은행 주차관리국에 배송한다. 전직 주차관리원이던 노인은 무인주차시스템이 들어선 이후 일자리를 잃었으나 복직할 도리가 없다. 인터넷 뱅킹이나 ARS로 자동 연결되는 대표전화로는 소위 ‘은행측 실무담당자’와 대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은행과 협상하기 위해 폭탄을 배송했지만, 협상의 과정은 꽤나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게다가 노인이 폭탄을 보낸 주차관리국은 이미 외주회사에 위탁되었기에 실질 협상대상이 되기도 어렵다. 고용도 해고도 얼굴 없는 기업이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은 용역에 위탁에 아르바이트를 거쳐 진행된다. 노인은 도대체 누구와 협상해야할지 마음이 요원하기만 하다. <폭발하는 황혼>은 해고 노인의 복직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다룬 영화다. 외주에 외주를 반복한 기업의 단순노동업무로 인해, 기업의 말단에 있는 사람들은 회사라는 실체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전통적인 상가를 재개발 명목으로 밀어버리고, 대형 복합 쇼핑몰 안에 상점과 사무실을 밀어 넣은 결과 복잡한 건물 내부에서 길을 잃기 일쑤다. 일터는 미로가 되고 회사는 불가해한 대상이 되어 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권력의 의지를 작동시킨다. 자동화, 효율화, 전산화를 통해 밀리고 배제되어 온 경제 사슬의 최약자층인 노인이 선택한 최후의 역습은 폭탄 테러리즘을 동반한 꽤나 급진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위기를 웃음으로 극복해 나가며 전개되는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고 은은한 애정을 끝내 잃지 않는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 The first snow The first snow

    첫눈이 내릴 듯한 11월의 새벽. 우유배달원(정성화)은 심야라디오를 들으며 상쾌한 마음으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상쾌했던 마음도 잠시, 매 층 정차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로 인해 무거운 우유통을 들고 고층아파트 계단을 뛰어다녀야 하는 일이 반복되자 점점 그의 기분은 난폭해져 간다. 그러던 중 번번이 한 신문배달원(김인권)이 엘리베이터를 전세 낸 듯 사용하고 있던 것을 알게 된다. 건전하고 명랑한 노동영화로 시작된 전개는 차차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배달원 추격전으로 변모해가다 결국 두 배달원 간의 본격적 격투장면에서 클라이막스에 이른다. <첫 눈 내리는 날>은 기실 익숙한 코미디 영화다. 그동안 제작자로 활동해온 길영민 JK필름 대표의 첫 연출작이기도 하다. 명품 조연배우를 통한 웃음코드 활용과 휴머니즘적 봉합으로 마무리되는 전개는 JK필름 특유의 코미디 영화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새벽 노동자들의 소소한 불화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나 세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코믹한 한 순간의 설정으로 갈등과 구조적 불화를 녹여버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정성화와 김인권이 겨루는 한 판 격투는 상업코미디 영화의 양념 같은 한 장면을 보는 듯 기시감이 든다. 그럼에도 단역으로 등장하는 취객은 신스틸러로서 제 몫을 다하며 눈길을 끈다. 그는 취중 진언을 통해 새벽의 난투극에 대한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이 순간이 영화에서 가장 에너지가 응축되는 장면이라는 점이 난센스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 Loser Boys Loser Boys

    공공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던 원재(이민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욕설을 늘어놓는다. 누군가를 협박하는 듯한 말투로 욕설을 내뱉으며 거들먹거리던 그는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서자 급히 자세를 고쳐 잡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화장실로 들어선 남자가 상사의 전화를 받고 쩔쩔매는 모습을 본 원재는 “X’밥이네”라고 일갈한다. 캐릭터의 성격을 짧고 굵게 보여주는 첫 장면 이후 벌어지는 영화의 주요 사건은 시험공부가 하기 싫어 괴로워하던 원재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승훈(조덕회)과 어울리다가 동네형들에게 붙잡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원재와 승훈은 마치 자신들이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과장된 말투와 걸음걸이를 보여주는데 그 작태가 허세의 끝을 보여준다. 이제원 감독의 <찌질이들>은 주인공인 원재와 승훈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굴다가 자신보다 조금 강해 보이는 형들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들고 심지어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과정을 별다른 기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힘주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두 철없는 친구들의 얼굴 표정이다. 아무리 표정을 일그러뜨려도 강해 보이지 않는 배우 이민구의 캐스팅은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 자체가 단조롭고 그 때문에 사건의 위기가 많은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다. 거친 남성성보다는 아직 제대로 피어내지도 못한 어린 남자의 밀림 적응기로서의 재미가 돋보인다. (김현수, 영화저널리스트)

  • The eternal theme of humanity The eternal theme of humanity

    인류의 영원한 테마라니. 이런 제목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정도의 스케일이 되어야 붙일 수 있는 제목이 아닌가? 하지만 김현준의 <인류의 영원한 테마>는 영화 찍는 것을 좋아하고 이성에 호기심이 많은 젊은 찌질이들의 에피소드 모음이다. 이들이 어떻게 인류의 영원한 테마를 이야기 할 것인가? 이 영화가 이 거대한 주제에 다가가는 방식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대신 찌질이들은 영화를 찍는다. 그것도 매우 원초적인 욕망을 담아서. 영화의 원초적인 욕망이란 무엇인가? 전-영화적 옵티컬 토이 중 하나인 핍박스나 초기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열쇠구멍을 통해 여성의 탈의를 훔쳐보는 형태의 영화들을 생각해 보면, 카메라 뒤에 서 있던 인간들의 원초적인 욕망은 관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음? 관음 하는 시선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데 -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랫동안 영화에서 관음의 대상은 오직 여자였다 - , 그렇다면 관음은 질 나쁜 욕망이 아닌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대상화나 타자화를 하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지 말이다.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에게 연정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매 순간 그 혹은 그녀를 대상화한다. <인류의 영원한 테마>의 주인공 온도가 고은에게 반하는 순간 역시 카메라 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온도에게 그녀는 카메라 안에서만 존재하는, 다가설 수 없는 이미지다. “카메라를 내리면 네가 사라질 것 같아” 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온도는 카메라를 통해서만 고은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관음이 성립되지 않는 순간은 언제인가? 바로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쳐다보았을 때이다. 온도에게 있어서도 쌍방향의 사랑은 관음의 구도를 깨뜨려야 가능하다. 관음의 구도를 간단히 깨뜨려 버리는 고은의 시선과 제스쳐는 희극인 이 영화 안에서 시적인 서정을 발견하게 하고, 인류의 영원한 테마를 찾는 정답 없는 게임은 그들의 사랑을 정답의 자리에 밀어 넣음으로써 다시금 시작된다.(한상희, 영화연구자)

  • Reserve Forces: An Unexpected Journey Reserve Forces: An Unexpected Journey

    2017년에 우리가 겪고 있는 서울 풍경을 한 번 떠올려보자. 지하철을 타면 지금도 여전히 국정원 간첩 신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신고를 독려한다는 것은 그저 사회 분위기 조장 차원일까? 아니면 누군가 실제로 남한 땅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영화는 누군가의 이런 상상에서 비롯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예비군 훈련을 가던 중 자리에 앉아 간첩신고 안내를 듣던 영철(박지원)은 누군가 황급하게 자기 무릎에 가방을 놓고 내리는 걸 보고 수상하게 여겨 쫓아간다. 영철은 공교롭게도 간첩으로 추정되는 무리와 엮이게 되고, 우연히 습득한 가방에 들어있던 서류뭉치가 간첩의 지령이란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는 배달 일을 하는 친구 성용(김찬년)을 불러 간첩의 가방을 습득했으니, 가방을 찾으려는 간첩들을 추적해 신고 포상금을 타내자고 유혹한다. 액션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영화의 대부분이 추격과 격투 액션으로 이뤄진 영화다. 어이없는 추격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군가나 주인공의 엉뚱한 액션 연기 등은 우왕좌왕하면서 간첩을 잡겠다고 뛰어드는 예비군(이자 경찰공무원 준비생) 청년의 마음 상태를 희화화한다. “이 영화를 모든 예비역 장병들에게 바칩니다.”라는 인사말로 끝을 맺는 김찬년 감독의 <예비군: 뜻 밖의 여정>은 재치 있는 부제가 알려주듯, 간첩 잡는 망상에 빠진 예비군 청년이 벌이는 코믹한 액션 추격극이다. 감독이 직접 연기한 주인공 친구 배역의 이름을 보듯, 이 영화가 성룡의 영화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왔음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간첩 잡는 주인공들에서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떻게든 찾아온 인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청춘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는 영화다. (김현수, 영화저널리스트)

  • Sachang-ri Sachang-ri

    부대 앞에서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준석. 복귀할 마음이 먹먹한 상태에서 마침 군인 연기자를 구하던 단편영화 제작팀 혜영에게 길거리 캐스팅을 제의받는다. 단편영화 팀에서는 실연당한 군인에 대한 단편영화를 찍던 중이다. 갑작스레 주연배우로 투입된 준석은 특별한 표정연기 없이 자연스럽게 역할에 녹아든다. 연출님 막내 혜영은 촬영장 내 선후배 간의 엄격한 위계관계 속에서 험한 일들을 도맡아 한다. 혜영과 작업하던 준석은 차차 그녀의 배려심에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고단한 그녀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전 여자친구의 오해는 돌이킬 수 없이 깊어져 준석은 옛사랑에 더 이상 희망을 갖기 어려운 지경이다. 연기를 통해서나마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던 준석은 자신을 챙겨주는 속깊은 혜영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사창리>는 실연당한 군인이 군인의 실연과정 대한 영화를 촬영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다.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는 것은 연기자인 준석만의 경우가 아니다. 촬영장 안에서의 인간관계 속에서도 속이고 속는 난맥상이 존재한다. 자기편인 줄만 알았던 혜영의 진심을 알게 된 순간, 준석은 자신만이 오롯이 촬영장의 이방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창리>는 그 순간의 헛헛함을 황당하게 풀어낸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코미디 장르의 어떠한 컨벤션도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자면 준석은 희극지왕이라기보다 비극지왕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가까이서 본 그의 입장에서는 비극이지만, 멀리 있는 우리에게 희극으로 보인다는 것. 이야말로 코미디의 서글픈 아이러니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 Monologue Monologue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많다. 단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이는 세상에 국한한다면 말이다.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고 뷰파인더에 담아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결국 아무도 없다. 영화 <모놀로그>는 웃음기 없는 아이러니의 영화다. 작품은 카메라를 통해 세상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고3 소년 정홍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스케치했다. 자신이 세상에 매혹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매혹되어 있기에, 실제 삶이란 소년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듯하다. 세상의 심미성에 도취되어 있지만 정작 그가 보는 것은 이미지의 피상적 층위일 뿐이다. 세계를 향해 카메라를 열어두었지만 자신은 정작 실제 세계와 불통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자기도취적 몰입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무심하고 세계가 타자들의 관계성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무관심한 얼치기 예술가의 정체성을 소년의 어정쩡한 포즈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하여 종내 한 전시포스터 앞에 멈추는 순간 비로소 소년은 자기가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관계성이 결여된 세계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세련된 스케치의 수준을 넘어 자기반영적 풍자 형식의 예술가 영화로 질감을 달리한다. 미니멀하게 전개되는 서사에 비해 촬영은 보다 세심하게 조율되었다. 점차 가로로 넓게 변환되는 화변비율은 소년이 지닌 세계관의 지평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대부분은 일몰의 시간인 골든타임에 집중되어 촬영되었다. 잿빛 감도는 연파랑과 연분홍 색조로 톤의 일관성을 집요하게 붙잡아가며 부드러운 조명을 활용한 촬영이 꽤나 인상적이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 Kim & Jang Kim & Jang

    자취의 상징과도 같은 치킨 쿠폰 기한 만료일, 김(김유동)은 친구이자 만년 입봉 대기 감독인 장(최준하)과 함께 다 모은 쿠폰으로 치킨을 주문하기 위해 장의 자취방을 찾는다. 김은 전화도 받지 않고 방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장을 보고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쥐 죽은 듯 자는 장의 얼굴에 낙서를 하고 한참을 낄낄대던 김은 누워 있던 장의 바지 주머니에서 유서로 추정되는 쪽지를 읽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김은 이대로 119 응급구조대에 신고를 하면 구조대가 왔을 때 장의 얼굴에 자신이 그려 넣은 음란한 문구를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의 파렴치한 실수가 만천하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 때부터 김은 생사가 불분명한 장을 방치한 채로 장의 생사가 아니라 자신의 생사를 위해 사태 수습에 나선다. 김영석 감독의 <김앤장>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연의 연속과 반전의 쾌감만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실험하듯 밀어붙이는 소동극이다. 엔딩 직전까지도 좁은 자취방 안에서 상황의 반전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한편,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 대사가 “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인데 이는 마치 결말을 열어놓고 실험하듯 밀어붙이는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에 보내는 메시지로 들리기도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황당한 상황 개그 뒤에 진짜를 담아내기 위해 무엇이든 진짜로 행동하고 그것을 몰래 카메라처럼 찍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짜배기 예술이 담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예술관을 향한 조롱이 숨겨져 있다면 과잉 해석일까. 인생은 반전 혹은 스릴러라 믿는 청년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진짜 반전을 겪고 난 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의문의 고딩(마민희)이 등장하는데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잡아채는 강렬한 캐릭터다. (김현수, 영화저널리스트)

  • Bittersweet Night Bittersweet Night

    밤이라는 시간대는 하루의 끝이다. 그래서 흔히 노년의 비유로 쓰여왔던 해질녘과 밤의 어둠은, 오늘 날에 와서는 오히려 젊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더 닮아있는 듯하다. 김은성의 <기쁜 우리 젊은 밤>은 심부름센터 배달원인 민재, 연극 배우이면서 대리운전 알바를 뛰는 해나, 안마기 영업 사원인 김호의 사연을 통해 치열한 도시의 밤 특유의 쾌활하지 못한 활기를 품은 어둠과 젊음의 유비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세 사람은 나름의 곤란에 처해있다. 민재의 여자 친구는 민재가 심부름센터를 그만두길 원하지만, 민재는 그것마저 그만두면 떠나가는 여자 친구의 마음을 붙잡을 케이크 하나 살 돈마저 마련하기 어렵다. 해나는 자신에게는 독립운동이나 마찬가지인 연극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리운전 알바를 해야 하고, 알바가 바쁘다보니 연극 일에 소홀해지는 악순환에 처해있다. 김호는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즉 대학을 가고, 자격증 12개를 취득하고, 토익, 토플, 오픽, 등등 가능한 스펙은 다 갖추었는데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 삶에 파묻혀 버렸다. 이 영화는 그런 세 사람의 삶의 단면을 유머러스하게 스케치하고 있지만, 해가 나 있는 장면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그 오랜 어둠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더욱이 영화의 결말은 아무런 해결책도, 작은 희망의 실마리도, 어떤 긍정적인 뉘앙스도 전달하고 있지 않다. 외려 아마도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젊음을 지나왔을 부장의 죽음이 추측되는 장면으로 갑자기 끝을 내고 있다. 유머러스하지만 어두운 톤의 이 영화가 그래도 삶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아닌 이유는 영화가 전제하고 있는 세 인물의 공통점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들의 젊음이다. 하루의 끝인 밤과 닮아 있지만 하루의 시작이기도 한 새벽과 맞닿아 있는 이들의 젊음,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젊음. <기쁜 우리 젊은 밤>에 한 번도 기쁜 순간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기쁜’ 우리 젊은 밤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한상희, 영화연구자)

  • Love Triangle Love Triangle

    ‘막장 드라마’라는 것이 한국의 TV문화 중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한때의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이미 대체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되어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막장이라며 손가락질하고(혹은 즐기고)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을 내세워 그 비난(혹은 쾌락)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 냄새는 소똥냄새였어>의 주인공 한나와 민지도 우리처럼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에이, 저런 일이 어디 있어”를 연발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인생은, 다들 모르는 척하면서도 알고 있다시피, 있을 법 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다. 막장 드라마는 외려 물리적으로 일탈성을 지닌 사건들뿐만 아니라 단조로움의 외피 아래 존속해왔던 감정적인 롤러코스터들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일상 속의 일탈적인 사건들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를 찾기란 어렵지 않고, 그러한 컨텐츠가 관객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버린지도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이 거짓말 같다는 아이디어나 우리가 그 안에서 연기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아이디어는 언뜻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냄새는 소똥냄새였어>는 그것이 의도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구조적, 내러티브적 클리셰 만큼이나 뻔뻔하리만치 철저하게 희극적인 만듦새로 진부하지만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이 영화의 묘미라면 두 주인공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희극적으로 과장되어 있어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연기가 일품인 두 배우의 콤비는 도입부 극중 극 배우들의 연기와 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루어 관객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면서도 완전히 도식화되어 있는 준호의 연기와도 기분 좋은 호흡을 이룬다. <그 냄새는 소똥냄새였어>는 어느 정도 클리셰를 안고갈 수밖에 없는 단편 장르극의 한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는 영리한 영화이다. (한상희, 영화연구자)

  • Confession Confession

    초등학교 소녀들의 교실 풍경과 우정 권력에 관한 드라마. 어느 날 하원(김채원)이 친구 시민(임수빈)에게 신인 아이돌 가수로 활동 중인 사촌 오빠의 싸인을 받아주자, 아이들 사이에서 난리가 난다. 이를 계기로 시민이 친구들에게 학급 반장선거에 하원을 밀어주자고 말한다. 시민의 의견에 친구들은 대체로 동의하나, 연정(권수정)은 평소에 공주님처럼 행동하고 물질로 친구들의 환심을 사려 하는 하원이 마냥 못마땅하다. 결국 반장 선거에서 하원이 떨어지자, 시민이 나서서 다른 후보를 뽑은 친구를 색출해내자고 강하게 주장하고 나선다. 이 때문에 연정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게 될 까봐 노심초사하게 되고 급기야 별 잘못도 없는 예림(유서진)에게 화를 내고 나쁜 상황을 만들어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위기에 빠뜨린다. 김우현 감독의 <고백>은 서로를 자신의 베프라고 말하며 몰려다니는 4-5명의 소녀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서로 죽고는 못 살 정도로 친한 애정을 과시하다가 사소한 이익이나 자존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와장창 깨지고 마는 유리 같은 심성이 빚어내는 교실 풍경은 흡사 약육강식의 논리만 존재하는 밀림을 보는 듯 아주 잔인하다. 링컨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진실한 고백이란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존재해도 괜찮은지를 고민하는 연정과 수진의 대화가 잔망스럽다. 누군가의 대사로 직접 등장하는 “진실한 고백이야말로 가장 현명하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친구들을 연기하는 권수정, 황윤정, 김채원, 임수빈, 유서진의 꾸밈 없는 연기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만든다.(김현수, 영화저널리스트)

  • Between you and me Between you and me

    “나는 여배우다. 지난 몇 년 간 겪은 말 못할 여배우로서의 고충을 시나리오로 쓰고 직접 감독을 맡게 되었다.” 첫 장면이 등장하면 자동차 안에서 여배우가 연기를 한다. 감독은 화면 밖에서 무전기를 통해 연출에 대한 전언을 목소리로만 전달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보는 장면이 <우아한 여배우>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영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앞의 장면이 <우아한 여감독> 속 등장하는 <우아한 여배우>의 촬영장면임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의 예측은 허를 찔린다. 그러나 결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감독님 연출하지 마세요>라는 작품 안에 여러 겹의 액자형식의 영화가 중첩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무의식은 누구의 것인가? 여배우의 것인가, 여배우에 대한 영화를 찍는 여감독의 것인가, 여감독에 대한 영화를 찍는 보이지 않는 감독의 것인가. 의심들과 판단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재수정이 반복된다. <감독님 연출하지 마세요>는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는 촬영 현장의 실상을 포착한 트릭의 영화다. 예뻐보이려 한다, 사회경험이 부족하다, 시나리오에 토를 단다, 연기 디렉팅에 불만을 표한다는 선입견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 무명 여배우는 촬영장에서 열악한 위계 관계 속에 놓여있다. 출연료도 없이 독립영화 현장에 투입된 여배우의 입장은 더더욱 그러하다. 촬영장 권력관계의 민낯을 보며 여배우의 입장에 대한 연민의 투사회로가 작동하는 순간 불현듯 이질적인 커트가 외쳐지고 지금까지의 권력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다. 그런데 영화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는다.이 물고 물리는 권력관계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감독 나아가 보이지 않는 영화 제작의 시스템이 놓여있다. <감독님 연출하지 마세요>는 그 보이지 않는 부조리함에 대한 네거티브 형상인 셈이다.(송효정, 영화평론가)

절대악몽

  • The Insect Woman The Insect Woman

    고등학교 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여주인공의 연설은 확실히 기괴하다. “가식을 벗어던진 이 시대의 진실한 감정은 무엇인가요? 주변의 역겨운 것들을 내 곁에 가까이 오게 한 후 침 뱉고 욕하고 구타하는 혐오 아닐까요?”라고 요약된다. <혐오돌기>는 혐오를 퍼붓는 가해자의 입장을 힘차게(!) 제시하는 영화다. 요즘 회자되는 혐오가 여성ㆍ장애인ㆍ성소수자 등 피해자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녀는 우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악한(惡漢)을 가장한 철학자다. 누구나 악당을 타자로서 거부하긴 쉬워도 악당의 의식 흐름을 따라가면서 내부로부터 비판하긴 어렵다. 교활하고 우아한 그녀는 뻔뻔하게 잔인한 짓을 감행하다가 나중에는 호되게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통상의 인과론적 서사와 달리 가치관을 주장하고 논박하는 대화가 초점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감정이란 혐오뿐이다”라고 자못 진지하게 그녀가 주장할 때 관객 누구나 마음속에서는 부정하고 싶어진다. 일련의 주장과 반박이 이어질 것이다. 서사는 그 문답들을 얇게 덧씌운 막이다. 가령, 혐오는 대상의 지질함에서 유발되는가 아니면 혐오하는 자의 권력의지에서 오는가? 혐오에 도덕적 반성을 능가하는 미적 탐닉이 따라붙는 이유는 무엇인가? 혐오는 예속시키는 감정인가 예속되는 감정인가 등등. 관념적 성향 때문에 영화의 미쟝센은 상징주의적이다. 죽은 개미와 텅 빈 광장을 담은 프롤로그는 김수용의 <안개>를 연상시킨다. <실제상황>(김기덕)의 영향도 엿보이는데 격렬한 말과 행동의 폭발을 연극무대 안에 가두어 관객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혐오감정에 호소했던 모 후보를 은근히 풍자하는 듯하다. 혐오정치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매수해서라도 피혐오자를 자기 가까이에 두려는 후보자의 노력이 눈물겹다. 그러나 이런 희화적 마무리는 아무래도 어설퍼 보인다. 오히려 영화 저변에 흐르는 혐오에의 탐닉으로부터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강력한 질문이 우리를 더 심난하게 한다.(이창우, 영화평론가)

  • Tender & Witch Tender & Witch

    혜화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샐러리 우먼이다. 그녀는 회사 동료들에게 자신의 닉네임을 '친절한'을 의미하는 텐더(tender)로 소개한다. 그러나 그녀의 소개와 달리,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는 혜화의 뒷모습을 로우 앵글로 서서히 다가가며 음산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뒤이어 카메라는 그녀의 측면을 소름끼치도록 기이한 형태로 무빙하며 이미지화한다. 오프닝 시퀀스의 마지막 쇼트는 혜화와 거울에 비친 그녀의 이미지를 대칭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녀에게 필히 어떤 비밀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둔 성적 파트너인 같은 회사 동료 ‘성준’에 대한 사랑과 집착,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업무를 떠넘기고 문책하는 김대리. <텐더 앤 윗치>는 정신적 압박을 통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혜화의 심리를 기묘하면서도 화려하지만, 분명하게 전달한다. 예컨대 그녀는 과중한 스트레스에 인해 신체적으로는 생리불순, 정신적으로는 병적 도벽을 앓고 있다. 이와 같은 상태는 표면적으로 회사 생활을 잘 해내가던 그녀의 삶에 큰 균열의 순간을 초래한다. 사내에서 물건들이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상황에서, 김대리는 자신의 시계를 훔친 범인으로 혜화를 지목하고 그녀의 가방을 조사하려 한다. 혜화가 이를 거부하자, 김대리와 그의 일행은 사내 CCTV를 검색하고, 목격자일 것으로 예상되는 성준의 예비 신부에게 찾아간다. 예비 신부와의 대화를 나누고, 우여곡절 끝에 혜화는 용의선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결국 시계를 훔친 혜화의 결백을 증명한 이가 증오의 대상 중 한 사람인 성준의 예비 신부라는 점이 그녀를 폭발시키고 만다. <텐더 앤 윗치>는 영화 제목처럼 한 인물의 표면과 내면 사이의 간극을 단순히 병리학적 상태로 환원하여 제시하거나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감독은 혜화가 처한 상황과 그녀의 환상(꿈)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지각되는 긴장의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리고 그녀가 느끼는 히스테릭한 감정은 전복의 반복을 통해 영화 이미지를 너머 스크린 밖으로까지 범람한다. <텐더 앤 윗치>는 감각적인 카메라 무빙과 스타일을 내세우면서도, 인물이 느끼는 감정적 하중을 그대로 전달하는, 인상적인 영화다. (박준용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Infinite Loop Infinite Loop

    인적이 드문 등산로. 평범한 등산 복장을 한 중년 남성이 누군가가 자살을 실패한 듯, 그 흔적만 남아 있는 나무 근처로 다가간다. 그는 현장 검증을 하려는 탐정처럼 부러진 나뭇가지, 자살에 사용되었을 로프와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 등 주변의 상황을 꼼꼼히 살핀다. 그의 행위는 마치 낯익은 공간에서 늘상 겪어왔던 익숙한 사건인 양 너무나도 담담하고 간결하다. 탐문을 마친 이 중년 남성은 여전히 조금의 긴장도 하지 않은 채, 붉은색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운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멀찍이 떨어진 한적한 등산로 한 가운데에 승용차 한 대가 어울리지 않게 정차되어 있는 것이 들어온다. 발길을 옮겨 승용차로 다가간 그의 눈에 죽음에 임박한 한 남성이 눈에 들어온다. 중년 남성은 재빨리 차문을 열어 연탄가스로 가득한 차 내부를 환기시키고 자살남의 상태와 차 내부를 살핀다. 그리고 그는 보조석 바닥에 놓은 가방을 발견한다. 가방 속에는 거액의 돈과 그 돈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는 자살남의 유서가 있다. <첩첩산중>은 자살이라는 동시대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고 있다. 자살의 원인은 너무나도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자살과 돈이 분리불가능한 상태로 얽혀 있는 순간부터, 자살은 더 이상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저버린 결과적 상황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자살남과 돈을 함께 발견한 중년 남성은 고민 끝에 새로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를 누군가의 죽음과 마주한 이가 그 존엄성에 대한 인륜적 도의를 지키는 것과 최소한의 노동 없이도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반인륜적 기회라는 기로에서의 선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해석의 가능성을 너무 쉽게 닫아버리는 일일 것이다. 중년 남성이 돈을 선택하는 이 우화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윤리’라는 통념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욕망의 징후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영화에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인물들이 유사한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의 반복은 그들의 선택이 우연히 중첩되는 우발성의 집합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징후의 공통적 차원인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박준용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Ratcatcher Ratcatcher

    한 노인이 있다. 집 앞에서 가방을 발견한 이후로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일이 벌어진다. 밤사이 인기척이 느껴져 거실로 나가보니 아이로 보이는 사람의 흔적이 있다. 놀라 불을 켜보니 거실에는 아무도 없다. 긴가민가한 생각에 거실에 카메라를 두고 밤새 녹화한 영상을 보니 쥐들이 침입한 흔적이 있다. 노인은 쥐를 잡으려고 쥐약과 쥐잡이를 놓아두고 잠을 청한다.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 거실에 나와보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쥐잡이>는 사건의 명료한 묘사보다는 노인이 겪는 혼란한 상황을 분위기로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작품이다. 안 그래도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최길섭 감독은 “노인과 쥐, 그리고 길 잃은 아이라는 소재를 통해 분위기로만 이야기가 전달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힌다. 감독이 말한 극 중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노인의 심리 상태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는 현실과 꿈의 개념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극을 끌고 간다. ‘… 곧 아름다운 음악에 취한 마을의 아이들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춤을 추며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는 자막은 동화의 도입부를 연상시키지만, 노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은 사실적인 느낌이고, 또한, 노인이 발견한 가방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은 신화의 요소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처럼 혼란한 꿈을 꾸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이 노인이 과연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후 사정이 궁금해진다. 영화 도입부 자막의 앞뒤에 놓인 말 줄임표(…)는 그런 점에서 관객의 해석을 요구하는 신호로 읽히기도 한다. 예컨대, 아내를 잃은 심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노인은 혹시 아이를 쥐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아무튼, 어떻게 해석하든 <쥐잡이>는 영화가 제시하는 분위기 묘사에 따라 노인의 전후 사정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 Dive Dive

    제목의 ‘잠몰 潛沒’은 ‘잠겨 들어간다’는 의미다. 영화는 주인공 우진이 심리적으로 잠겨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수영과 연관해 풀어간다. 우진은 학교에서 수영선수로 활동 중이다. 이번에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시 대표 선발전에 나갈 기회가 생긴다. 의욕은 앞서는데 생각만큼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연습이 부족해서다. 우진에게는 형이 있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동생의 병간호가 없으면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다. 아버지가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싶은데 생활비와 형의 병원비까지 벌어야 해서 그럴 수도 없다. 연습은 언감생심, 우진은 이러다가 수영을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사실 우진에게 현실의 수면 위나 아래나 숨쉬기 힘든 건 매한가지다. 형의 병간호에 신경 쓰면 그만큼 수영 연습할 시간이 부족해 기록을 개선하기 어렵고 반대로 연습에만 몰두하면 형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 가라앉는 물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수면 위로 올라와 봐도 숨을 쉴 수 없어 우진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힘차게 팔을 휘저어보지만, 시야를 가리는 물보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진에게 시계 제로의 상황은 곧 미래 없음을 의미한다. 미래가 없는 삶은 공포 그 자체다. 귀신이 등장하지도, 으스스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도 않지만, <잠몰>이 공포물로 다가오는 건 우진의 처지가 결코 나아질 구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의 깊은 우물 속을 직접 경험하며 성장하기 마련이다. 이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독립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 텐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우진이 수영에 집착하는 건 형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을 힘을 다해 팔을 움직이고 발을 쳐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잠몰하기만 한다. 우물 밖으로 나가야만 독립할 수 있는데 그의 발을 잡아끄는 가족이란 운명의 끈은 질기고 고약하다. 그런 운명에 좌절을 하겠지만, 우진의 욕망이 결코 멈출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허남웅, 영화평론가)

  • POUR POUR

    <입하>의 제목은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절기’를 의미한다. 영화의 배경은 당연히 초여름이다. 주인공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다. 소년은 아빠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다. 그런데 차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형사로 근무하는 아빠는 비번을 맞은 날 사건 현장으로 나오라는 명령에 화가 나 있다. 소년은 아무 말도 없이 창 바깥을 바라볼 뿐이다. 남편이 아내를 칼로 난자한 사건 현장에서 아빠는 소년을 차에 두고 사건 당사자 부부의 사라진 딸의 행방을 찾는다. 차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난 소년의 눈에 아빠는 온데간데없고 어느 소녀가 사건의 집으로 들어간다. 불에 탄 듯 그을리고 물건이 마구 어지럽게 놓여 있고 이 층으로 가는 계단이 미로의 구조로 되어 있는 문제의 집은 소년의 심리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아빠와 소년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그들 사이에 있어야 할 한 사람, 각각의 아내이자 엄마가 없는 것과 관련이 깊다. 소년의 가족은 어떻게 해서 해체, 아니 파탄 지경에 이른 것일까. 정확한 사연을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추측할 수 있는 단서들을 문제의 집 곳곳에 배치해 두고 소년의 심리를 읽게끔 이야기를 유도한다. 예컨대, 남편의 아내 살해 사건은 우회적으로 소년의 아빠와 엄마가 헤어진 이유가 꽤 폭력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입하>의 의도는 소년이 왜 아빠와 관계가 좋지 못한지, 엄마와는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이유를 따져 묻는 데 있지 않다. 성장 과정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정면에서 마주해야 하는 과거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소년에게는 사건 현장에서 마주하는 가족 파탄의 과거사가 그렇다. 이 고비를 넘으면 정신의 성장을 이룰 수가 있다. 끔찍해서 생각도 하기 싫은 과거를 극복하게 되면 앞으로는 좀 더 태연한 감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문제의 집 밖으로 소년이 나오자 여름비가 내리며 그의 마음속에 남았던 일종의 폭력의 기억을 깨끗이 씻어내린다. 그동안 봄의 상태에 머물렀던 소년의 정신은 일련의 소동을 거치면서 ‘입하 立夏’의 시기를 맞이한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 The Troubled Troubadour The Troubled Troubadour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일본인 음유시인이 작은 기타를 퉁기며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는 로드무비다. 그가 통과하는 에피소드는 각 나라의 신화, 전설, 민담의 은유를 면밀하게 차용하고 있다. 망자를 운반하는 뱃사공 카론, 아이들을 몰고 간 피리 부는 사나이, 한국의 무속신앙, 원효대사와 해골바가지, 악마와 거래해서 연주 실력을 얻었다는 블루스 음악의 대가 로버트 존슨에 관한 이야기 등. ‘전 세계 범위의 작은 마을’이라는 역설적이지만 이상적 공동체를 음유시인이 주유하는 낙관을 전제한다. 모든 에피소드에 스며들어 있는 집단서사와의 연결 덕분에 비록 음유시인 한 사람의 이야기임에도 마치 마을 주민들 여럿을 모아놓고 들려주는 구비 문학 같은 느낌이 생겨난다. 후반에 가면 음유시인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컴컴한 터널을 홀로 통과해야 한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흥미롭게도 그는 우리와 똑같은 암울한 현대인이 될 수밖에 없다. 고립된 그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 때문에 번뇌하는데, 그곳을 탈출하려면 원효 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획기적 깨달음의 계기를 통과해야 한다. 영화의 미쟝센은 형언할 수 없이 묘하다. 적어도 세 가지 이질적 음성들이 서로 경쟁한다. 동화처럼 아기자기하고 들떠 있는 듯하지만, 전쟁, 종교, 문명에 관한 묵직한 서사시 같기도 하고, 임종을 앞둔 개인의 애잔한 소회로도 보인다. 천진함, 집단성, 고독의 요소는 보통 어울리기 힘들지만 마르케스의『백 년 동안의 고독』같은 라틴 문학에서는 수렴하곤 한다. 이 영화 또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강하다. 줄거리는 철학적ㆍ 종교적 순례로 볼 수도 있고, 사회ㆍ역사에 관한 문화비평으로도 볼 수 있다. 전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 그 도정에서 타인의 해방을 돕는 예술의 즐거움, 윤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후자로 볼 경우, 숲 속에서 공동체의 영혼처럼 울려 퍼지던 예술이 도시로 나가면서 상업적인 기술복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 이를 초극하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 강조될 것이다.(이창우, 영화평론가)

  • Survivor Survivor

    <살아남은 자>는 화물차 기사였다가 세월호 참사 이후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경제난으로 어렵게 지내왔던 김동수 씨의 실화에 토대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세월호 사건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뗀다. 신원미상의 중년 남자가 구청과 병원을 들락거리는데 그가 앓는 불안 증세에는 다들 무관심하다. 둥근 세탁기 입구가 구해달라는 배의 창문 같고, 운전하면 보행자를 칠 것 같다. 단원고 학생을 연상시키는 극중 딸이 아빠는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왜 그러냐고 보다 못해 짜증을 낸다. 이쯤 되면 관객은 소방 호스로 사람들을 구한 ‘파란 바지의 영웅’ 김동수 씨일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개인이 탈역사적 공간에서 겪는 심리적 방황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두 가지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첫째, 저분이 왜 저렇게까지 앓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이 스스로 질문하게 하기 위한 의도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정보가 지금처럼 범람하는 적이 없는데, 정작 의로운 생존자는 여론의 관심 밖에 있다. 이때 영화는 한 가지를 더 말하기보다 화면 내부의 정보를 희박하게 함으로써 차라리 관객이 외화면(off screen)에서 찾아 나서도록 한다. 둘째,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연옥에 갇힌 몽환적 의식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저승과 이승이 갈라지는 순간을 체험한 주인공은 그 후로도 가련한 희생자와 비겁한 도망자 사이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말단의 선장에서 정상의 대통령까지 도망자 집단이라고 할 국가가 3년째 지배해온 현실에서 희생자들의 분한(憤恨)은 해소될 리가 없다. 따라서 주인공은 죽은 자를 대신하여 국가에 분노하지만, ‘살아남은 자’라는 사실만으로 국가를 대신해서 죽은 자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는다. 갈기갈기 찢겨지는 그의 심신은 그가 의도하지 않게 산 자와 죽은 자의 매개자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 부조리의 바로미터인 그의 신체마비와 자살충동은 희생자의 넋이 진정하게 위로받으면 나란히 치유될 것이다. (이창우, 영화평론가)

  • Dead Time Dead Time

    어린 시절 인애는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유리창에 자신의 머리를 반복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보고 만류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그녀의 어린 딸을 물러서게 한다. 그의 상태는 어떤 원인을 말미암아 자신의 신체를 가해하는 강박 장애를 겪고 있다. 인애는 자신의 손에 묻은 아버지의 피를 보고 놀라, 방으로 돌아온다. 이를 알리 없는 동생 설애는 인애에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벌레가 부딪치는 소리로 오인하고 “벌레들은 사람이 사는 집에 들어오면, 미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대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의 오프닝 장면, 발달장애의 남성이 회사로 복귀 중인 인애에게 말을 건넨다.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는 인애. 하지만 인애에게 그런 그의 모습인 낯설지가 않다. 도시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산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 아버지. 인애는 설애의 상견례를 위해 아버지를 찾아 그가 묶고 있는 깊은 산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인애 역시도 아버지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녀는 주변 인물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정서불안과 대인기피증적인 증상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고 있다. 증상은 전연 다르지만, 인애는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이번만은 설애의 상견례를 위해 아버지를 꼭 모시고 하산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는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묘종의 폭력일 수 있다. 어린 설애의 말 속에서 ‘벌레’는 단순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시태적 교환 가능성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대사 자체가 은유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사회라는 인공적인 세계가 마련하고 있는 제도와 같은 제반적인 요소들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을, 혹은 다른 사람들을 ‘미친’ 상태로 규정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밀실>은 차이와 이해 사이의 간극을 다시 한 번 사고해 볼 것을 요청한다. (박준용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Down Fall Down Fall

    유색인종, 노숙자, 야만인 등 불결하다고 규정된 계층을 덮은 ‘때’는 그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전통적 기표다. 만약 원전 폭발로 오염된 지역 주민들이 외부세계로부터 2등 국민으로 낙인찍힌다면, 그 지역에 내린 ‘낙진’은 과학시대의 ‘때’가 될 것이다. <낙진>의 공간적 배경은 피폭 후 세월이 흘러 사회로부터의 차별이 굳어진 상상의 지역 ‘양강’이다. 지역 이름은 탈북자를 빈번히 배출하는 북한의 오지 양강도에서 따온 게 분명하다. 아닌 게 아니라 줄거리는 양강 주민인 형제가 외부지역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고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양강은 양강도나 연변 자치구처럼 역사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과학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창조되었다. 개발에서 소외돼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지옥이 된 것이다. 탈북자 담론은 지옥(북한)에서 천국(외부)으로의 일방통행 이야기다. 반면에 <낙진>은 지옥(양강)이 천국(외부)을 위해 양분을 공급하고 천국의 배설물이 지옥에 쌓이는 순환구조다. 다시 말해 양강 출신의 값싼 노동력과 그곳에서 밀반출된 오염된 모래는 주류 사회 기업들의 비용절감을 위한 양분이다. 만약 주류 사회에서 피폭 사건이 발생한다면 양강은 희생자를 은폐해야 할 묘지가 될 것이다. 형제는 양분 및 배설물과 함께 이동한다. 형제가 시민권을 얻고자 외부세계 권위자의 명령에 몸을 낮출수록 희생자 은폐의 하수인으로서 죄의 때가 묻을 것이다. 희망에 가까이 하려는 노력 때문에 나락에 빠지는 형제의 이야기는 신비의 빛을 발산하던 발전소가 그 빛의 저주로 변질되는 사태와 똑같다. 구조적 모순이 인생의 딜레마로 축약된다.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거친 질감이다. 그 요인으로 단편영화로서는 탁월하게 사실적인 분장, 연기, 의상, 소품을 들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줄거리를 부차화할 정도로 생생한 사회에 대한 르포르타주 같은 묘사 -부패한 경비대, 안이한 건설 현장, 찢어진 방호복 응급처치, 분노에 찬 선술집 군중 등 - 덕분이다.(이창우, 영화평론가)

  • Classified Classified

    어느 신문사 보도국 사회부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준태는 선배 상철의 부름을 받는다. 보도국 건물과는 동떨어진 창고 같은 곳에서 준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주는 소스를 가지고 기사를 완성하면 높은 직급과 보수가 보장된다는 제안을 받는다. 조건도 좋겠다 덜컥 선배의 제안을 받은 준태는 기사를 쓰면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거짓 기사가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같이 작성되어 ‘누군가’에게 유통된 것. 선배가 없는 틈을 타 상자에 봉인된 자료를 뒤지던 중 침입자와 맞닥뜨린다. 그는 다름 아닌… <기밀>은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이들이 어떻게 기사를 조작해 여론을 만들고 대중을 통제하는지에 대한 우화다. 특히 이 영화가 한국전쟁의 휴전 이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사실은 중요하다. 한국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여론의 추이는 이념 양상으로 갈라지기 십상이다. 바로 그와 같은 틈을 비집고 언론을 사적인 이득 추구에 활용하는 집단이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도 기사가 유통되는 공간은 제한적이다. 기사의 생산자가 설계한 프레임에 따라 우리는 세상을 보고 듣고 체화한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해석한다고 해도 편집된 정보들로 세상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감독은 <기밀>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짜로 보고,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극 중 기사가 조작되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머무는 곳은 공통으로 땅 밑이다. 생산자는 기사를 조작해 지하 여론을 조성하고 이를 소비하는 이들은 지상의 빛이 전혀 새어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곳에서 까막눈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정보의 구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허남웅, 영화평론가)

  • Green Light Green Light

    애니메이션 <그린 라이트>가 묘사하는 극 중 세계는 ‘레드 라이트’다. 핵전쟁이 벌어졌는지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전투기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대지가 메말라 초록빛 자연의 흔적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의 와중에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는) 마리는 죽은 땅 위에 자연의 싹을 틔우려 노력한다. 그런데 그가 살리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로봇이다. 연구소로 보이는 건물 안에 들어왔다가 고장 난 로봇을 발견한 마리는 그를 수리하고 고쳐 우정을 쌓아간다. 로봇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영화는 그에 대해 정확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와 같은 배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끔 여기저기 단서를 남겨두는 구조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마리가 로봇을 발견했을 때 벽에는 전단이 붙어 있다. ’로봇 하우스키퍼 Robot Housekeeper’의 문구 아래로 로봇과 소녀가 손을 잡고 사이좋게 서 있는 모습이 디자인되어 있다. 그러니까, 마리가 발견한 로봇은 인간을 돕기 위해, 아니 인간과 사이좋게 공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과 다른 신체 구조를 지녔지만, 이 로봇이 인간이 지닌 감정을 이해하는 존재라는 것은 몸체에 이상이 생겨 동작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정에서 알 수 있다. 영화는 로봇 간의 싸움이 벌어져 마리가 발견한 로봇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짧은 묘사로 드러낸다. 인간이 이 세계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로봇끼리 대립한다는 건 로봇 또한, 인간처럼 감정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인간 만이 아닌 로봇’도’ 주체가 되어 함께 살아갈 세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말은 자연이 충만한 지구, 즉 그린 라이트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로봇의 참여가, 아니 로봇이 더 많은 이바지를 할 거라는 미래를 향한 희망이기도 하다. 희망은 함께 할 때 더 커지는 법이다.(허남웅, 영화평론가)

  • Where Nobody Can Go Where Nobody Can Go

    부정적인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결국 지배와 복종 관계로 묶일 수밖에 없는 걸까? <갈 수 없는 나라>는 이 문제를 세 단계에 걸쳐 탐색한다. 첫 국면은 코믹하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병상 앞에 조아리고 앉은 형제들이 유산을 바라는 상황. 분위기는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영면을 반길 것인가, 슬퍼할 것인가? 과도하게 호들갑 떠는 자손들의 행태는 우스갯거리다. 저승은 산 사람에게 ‘갈 수 없는 나라’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기를 ‘거부’하는 그 컴컴한 세계로부터 ‘소유’할 것을 얻고자 기갈 들려 있다. 그렇다면 지나친 거부와 집착은 동의어 아닌가? 두 번째 국면은 호러다. 결혼비용이 궁한 호재와 여자 친구 선희는 유산 분배 동의를 받으러 외삼촌을 찾아간다. 외삼촌은 농촌 외진 마을에 고립된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 같아 보이는데, 놀랍게도 그 집단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망자의 시체에 집착한다. ‘거부’됨의 직접적 표식인 흉한 피부를 드러낸 채로 시체는 산 자들에게 ‘소유’된다. 그 그로테스크함은 앞서 유머로 표현되었던 이율배반의 심층에 비정상적 역겨움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정치 드라마다. 호재와 선희 각각의 마음속 방에는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들어 있음이 밝혀진다. 시체란 정상인이라 할지라도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집착이다. 자기가 평생 겪는 고통에 책임져야 한다고 암암리에 비난하는 관념적 대상, 그래서 복수하거나 반대로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할 마음에 난 검은 구멍들. 종교집단과의 만남은 그들을 거기에 도착시킴으로써 신도들의 상태와 비슷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소름끼친다. 합리성을 믿는 호재가 선희에게 미신 따위는 없다고 강변하는 모습은 외삼촌이 호재에게 미신을 주입하던 모습과 판박이다. 두 사람은 화(禍)와 복(福)을 주관하는 수호성인이 되거나 그것의 열렬한 맹신자가 되어야 하는 끔찍한 선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최근까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유행한, 음산하게 권위자를 숭배하는 흐름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 작품이다. (이창우, 영화평론가)

4만번의구타

  • Girl at the door Girl at the door

    매일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 가족들에게 그의 폭언과 폭력은 언제나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혜리만은 어딘가 다르다. 그녀는 집의 현관문 앞에 서서 무릎과 팔꿈치에 아대를 착용하며, 혹시라도 발발하게 될지도 모를 ‘아버지와의 전투’를 대비한 후에야 집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혜리가 현관문을 열고 아버지라는 이름의 압제적 권위로 가득 찬 세계의 주인(아버지)과 대면하는 순간, 그녀의 각오와 용기는 단번에 휘발되어 버린다. 그리고 혜리를 보자마자 폭주해버린 아버지. 혜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유일한 안식처인 자신의 방으로 피신하는 것 뿐이다. 쓰라린 실패의 순간, 혜리는 문 너머 아버지를 향해 격투기 파이팅 자세를 잡으며 다음을 기약한다. <혜리>는 가부장제의 부정적인 양태의 현신(現身)으로서 아버지, 즉 가정의 평화와 안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존재로서 아버지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오프 스크린에 위치할 때마저도 아버지의 이미지는 마치 집 안 모든 공간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처럼 지각된다. 이 공포스러운 형국 속에서 혜리와 남동생을 지켜주는 것은 아버지와의 분리를 보장하는 ‘문’이다. 공간의 안과 밖을 이어주기도 하고, 단절시키기도 하는 문은 아버지의 세계와 그 속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혜리의 세계를 분할하는 경계로써 작동한다. 광각의 렌즈를 통해 재현된 혜리의 방이 갖는 공간성은 혜리가 처한 상황과 그로부터 말미암은 심리의 변화와 절묘하게 맞물리며, 혜리와 동일시할 수 있는 몰입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혜리가 다시 저 ‘문’을 열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불확실한 미래일지언정 어떤 변화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 다시 찾아온 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고성과 폭력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 혜리는 다시 방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내쉰다. 혜리는 방문을 열고 나아갈 것인가? 아버지로부터 가족과 아버지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박준용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Mr. Huh Mr. Huh

    울창한 숲을 뒤에 걸고 있는 황량한 공터. 거기에 쪼그려 앉은 턱 없는 탈을 쓴 사내가 있다. 돌연 그가 화면에서 빠지자마자 ‘허도령’이라는 제목이 떡 하니 뜬다. 곧장 하회탈과 허도령 전설을 떠올리게 된다. 우환이 닥친 하회마을, 신령이 말한 대로 홀로 틀어박혀 탈들을 만들다가 그를 사랑하던 여자에게 발각돼 죽음을 맞는다는 설화. 다만 기시감은 허도령이라는 이름과 턱이 없는 이매탈, 딱 거기까지다. <허도령>은 보험사기를 저질러 회사에서 쫓겨나고 경찰 수사까지 받고 있는 보험설계사가 목을 매달다가 허도령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판타지다. 시간을 돌려주는 대신 매달 메밀묵을 준비해놓으라는 약속을 하지만, 설계사는 여느때와 같이 생활하면서 약속을 잊고 만다. 김종성 감독은 약속에 대한 우화를 만들겠다는 뜻으로 이 영화를 연출했다고 밝힌다. 들어갈 때 나갈 때 기분 다르다는 말처럼 위기를 모면한 뒤엔 약속을 기억조차 못하는 주인공은 우습다기보다 비열하다. 늦었다는 사과는커녕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죄의 덩치를 자꾸만 키울 뿐이다. 반성하고 자기 태도를 고심하는 태도가 영화 속에서 전무한데, 캐릭터 구축이 성기다기보다 현대인의 황량한 사고방식을 드러낸다는 인상이 더 크다. '해학'의 미덕은 가벼운 톤 속에도 누그러지지 않는 날카로운 비판이 아니던가. 많은 걸 담아보려는 의지가 역력하다. 얼핏 허도령이라는 토속적인 캐릭터를 통해 걸쭉한 말의 코미디를 만들려나 싶다가, 보험설계사의 사연에서 세태를 꼬집기도 하고, 클라이막스에선 한바탕 액션을 늘어놓기도 한다. '시도'라기보다 '성취'라 부르고 싶은 액션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아우르는 테마는 올곧게 이어진다.(문동명, 영화저널리스트)

  • Call Call

    진동벨이 울린다. 차에 한 남자가 타고 있다. 남자는 흘리는 듯한 가벼운 톤의 목소리로 “예. 사장님, 바로 가겠습니다.”라 말한다. 곧바로, 일부러 만든 굵고 애교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으로 모시겠습니다.” 김강우. 마른 얼굴에 어딘가 맹해 보이는 눈을 가진 이 남자는 대리운전 기사다. 개인콜은 물론 심부름 서비스와 각종 대행까지, 돈 되는 일이면 어떤 일이든 개의치 않는다. 그는 손님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만큼 자신의 것을 잘 챙긴다. 마치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개 같다. 어떤 일인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 아무 일이나 막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콜을 받으러 간 강우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려 살인자로 추정되는 남자의 대리운전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스릴러로서의 그 장르를 본격화한다. 영화는 강우를 관객보다 뒤늦게 스릴러에 개입시킨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만약 편의점 혹은 더 이른 시점에 강우가 남자의 범죄를 인지했더라면 영화는 지금과 같은 서사를 전개할 수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눈치 빠르고 생존본능이 강한 강우는 한적한 국도로 진입하기 전에 이 남자에게서 벗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강우가 주유소에 가서야 범죄를 인지하는 것은 이 영화의 서사 전개와 강우의 성격이 모순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강우가 남자의 살인을 확인한 순간, 영화는 액션 영화의 장르성을 추가한다. 추적과 몸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추적의 긴박감이나 액션의 박진감이 아니다. 이 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더욱 희게 보이는 강우의 얼굴이다. 강한 분장으로 새하얀 강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표현을 넘어 마치 피에로처럼 보인다. 우스꽝스럽고 절박하며 참혹하다. 얼굴 군데군데 더해진 피는 이 같은 느낌을 강화한다. 이제야 그가 제 얼굴을 찾은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그 어느 날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강우의 핸드폰 진동벨은 멈추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가슴으로 뛰는 믿음콜 김강우 기사입니다.” (권은혜, 영화연구자)

  • PLAQUE PLAQUE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고, 타자가 욕망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욕망한다. 이러한 논리 안에서 나는 곧 타자이다. 중반부에 이르기 전까지의 <치석>은 이러한 라캉의 논의를 잘 보여준다. 희수는 자신의 남편의 애인인 미선을 욕망한다. 희수의 귀와 눈, 입술은 그녀 남편의 귀와 눈, 입술이 된다. 미선은 희수가 동료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고, 희수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관음증적 시선으로 더듬으며, 자신의 입술에 닿은 희수의 손길에 가벼운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더욱 재미있는 것은,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라캉의 욕망으로 설명 가능한 영화가 된다는 사실이다. 희수의 남편이 등장하여 “희수야, 좀 친절해져 봐.”라고 이야기하는 회상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이 영화는 레즈비언 영화로 읽힌다. 초조한 상태로 미선을 기다리며 미선의 팔을 훔쳐보고, 미선의 손길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어찌할 수 없이 전율을 느끼는 희수를 보며 상상하게 되는 후반부의 전개는 ‘희수는 미선을 좋아하는 것인가.’ 혹은 ‘그냥 저 정도의 스킨십을 즐기기만 하는 것인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고백을 하게 될까.’ 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의 “희수야, 좀 친절해져 봐.”라는 남편의 말소리는 이 영화를 레즈비언 영화에서 치정극으로 바꾸어 놓는 반전이다. 또한, 희수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성애의 장면이 불가능한 소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판타지’가 아닌 구체적 정황에 의한 ‘상상’의 차원으로 전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가 선택한 치석 제거 시술이라는 설정이 돋보인다. 치과에서 경험하게 되는 수동성과 불가피한 스킨십, 시술 과정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의 요소들이 희수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성애적 장면들과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복합적이고 감각적인 순간들이 절묘하다. (권은혜, 영화연구자)

  • Comprehensive Insurance Comprehensive Insurance

    "난 오늘 결심했다. 내 남편을 죽여버려야겠다고." 밤늦게 을씨년스러운 골목으로 들어온 여자는 업자에게 보험금을 떼어주겠다며 남편을 죽여달라고 청한다. 보험관련 일은 안한다고 강짜를 놓는 업자에게 잔뜩 경계하는 여자는 좀처럼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이거 공짜 이벤트 믿을까요?" 묻자 "공짜에 환장한 놈이니까"하고 대답한다. 맞다. 주인공의 남편은 정말 공짜에 환장할 법한 사람이다. 기껏 고기 구워다가 바치니 이거 세일해서 사온 거냐며 잔뜩 인상을 구기고 묻고, 마트 포인트를 허락 받고 쓰라고 경고하다니, 보는 이로 하여금 대번에 '극혐'을 이끌어낸다. 코미디에서 희화화해 묘사했을 법한 극단적인 비호감은 웃음기라고 하나 없는, 어쩌면 바로 살인이라도 일어날 법한 축축한 분위기에서 그려진다. 결혼 6년 만에 (그들에겐 아이가 없는 것 같다) 여행 한번 가자는 제안에 곧장 제정신이냐 대답하고, 이벤트 당첨됐다고 하니 기름값은 어쩌냐고 다그치면 그 어마어마한 여성혐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단 몇 분만에 이만한 비호감을 전달하는 경우는 이전 한국영 화에선 없었을 것 같은 정도다. <종합보험>의 연제광 감독은 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어져 긴장이 증폭되는 영화는 심리묘사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가부장의 폭력적인 태도까지 제대로 담아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결론으로 도달하지만, 이 비극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가하는 여성에게 가하는 이기심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 역의 신재훈 배우의 연기가 발군이다. (문동명, 영화저널리스트)

  • Him Him

    어비리. 영화 <저 사람>의 배경으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위치한 마을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어비리의 인서트 컷들이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정겹다. 촌스러운 간판을 단 나지막한 1층짜리 가게들과 낡고 버려진 건물들은 영락없는 한국 시골 읍내의 풍경이다. 주인공 성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익스트림 롱 쇼트로 찍힌 어비리의 풍경도 인상적이다. 성호의 트럭 뒤로 보이는 커다란 이동 저수지 때문이다. 나들이를 가본다면, 이 영화의 장르인 스릴러의 배경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느껴질 것 같다. ‘어비리’라는 말의 어감도 재미있다. “사장님, 어비리에 땅 좀 있습니까?”라고 묻는 부동산업자의 동그랗고 퀭한 눈이나, 성호가 동네 형님 최선박을 보며 “저렇게 어리벙벙하니까, 마누라가 바람이 나지.”라고 하는 이야기는 어쩐지 ‘어비리’와 어울린다. ‘어비리’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인물들의 위상 전환이 흥미롭다. 땅을 팔라며 성호의 철물점을 찾은 부동산업자의 수상한 서성임이나 최선박이 사들인 낫과 삽, 마대자루는 이들이 사건의 주체가 되고, 성호는 사건의 연루자 혹은 대상이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영화는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바꾼다. 성호는 사건의 주체가 되어 최선박 대신 낫을 들고, 부동산업자는 그 낫을 맞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계기는 성호의 아내, 부우홍에게 일어난 일과 미친듯한 그녀의 비명소리, “저 사람”에 있다. 그러나 이는 주체와 대상의 전환보다 더 중요한, 이 영화의 반전을 몰고 온다. 발작적으로 들려오는 부우홍의 “저 사람”이라는 비명은 성호와 관객이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섬뜩한 인식, 소름 끼치고 아이러니한 이 영화의 마지막을 가능하게 하는 소리이다. 영화의 순간순간, 나홍진 감독의 장•단편 영화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언젠가 만나게 될 김연조 감독의 장편에서도 이러한 호흡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권은혜, 영화연구자)

  • Thirsty Thirsty

    희준은 중국집 배달부다. 음식값을 받을 때 몇천 원씩 더 받아 챙기고, 그 돈으로 아버지의 식사를 해결한다. 일하는 사이 시간, 같은 배달 일을 하는 동네 친구들과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일하는 가게의 음료수 한 캔을 마시는 것이 희준의 휴식이다. 가난하고 단조롭고 미래가 없는 삶. 비록 현실은 그러하지만, 희준에게는 오기가 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인물은 성용이다. 중학생 시절, 두 살이나 더 많은 성용과 맞붙어 그를 울렸다. 배달하던 중 우연히 만난 성용으로부터 자신의 밑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지만, 희준에게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다. 우연한 계기로 성용의 수상한 낌새와 아지트를 알게 된 희준은 경찰에 신고하자는 친구의 이야기를 뒤로한 채 자물쇠를 부순다. 다시 한번 성용과 맞붙게 된 희준은 이번에도 악착같은 깡다구로 그와 맞선다. 자물쇠는 두 개였다. 즉, 그에게는 이 결말을 피할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특유의 배짱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그는 더 이상 멈출 수 없게 된다. 돈. 누아르 영화에서 돈은 인물들을 끝 간 데 없이 몰아가는 계기이다. 마술이나 마약과 같다. 돈을 보고 만지는 순간, 그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누아르 영화의 공식대로, 곧이어 범죄가 뒤따른다. 돈과 범죄. 이 둘이 만나 ‘돌이킬 수 없음’이 확정적으로 선고되자 아이러니하게도 희준의 삶에 미래가 생긴다. 그 미래는 어둡지만 그래도 이전의 삶에서는 없던 것이다. 그는 정신을 다잡고 어둡고 고독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 미래는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다. 쓰러진 친구를 보며 멈칫하는 희준이지만,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냥 달리는 수밖에.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밤의 적막을 가득 채우는 오토바이 소리와 가파른 오르막을 내달리는 듯한 카메라의 앵글은 희준에게 닥쳐온 어둡고 고독한 미래, 아니 지금을 은유하고 있다. (권은혜, 영화연구자)

  • Wrestler Wrestler

    2D 애니메이션에 씨름이라는 한국 전통의 소재. 이 두 가지만 들으면, 곽기혁 감독의 <씨름>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혹은 지금의 시점에는 너무 오랜 방식과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기법과 소재는 “순수한 액션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연출 의도에서 알 수 있듯 감독 스스로가 제한한 것이자,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발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은 <씨름>의 기법과 소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씨름>에는 별다른 대사가 없다. 종종 관중들의 이야기 소리나 씨름을 하는 인물들로부터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의 말소리가 들려오긴 하지만, 이는 사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씨름>에서 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감탄사이다. 즉, 이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는 씨름이라는 역동적 행위이고, 사운드는 사람들의 감탄사와 영화 내내 흥겹게 울려퍼지는 농악대의 음악이다. 여기에 더해진,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할 다이나믹한 화면 앵글과 구도, 씨름을 겨루는 이들의 과장된 신체표현과 공간의 왜곡은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관객들에게 예상치 못한 흥미와 쾌감을 유발한다. 영화는 액션에 집중하는 만큼 씨름 고유의 겨루기 방법들과 요령에 대한 묘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보다 작고 약해보이는 주인공과 가장 크고 괴물 같은 인물의 겨루기 끝에 내려지는 반전은 ‘그래서 승리가 더 통쾌하다.’라는 생각 이전에, ‘잘 버티는 것이고, 기술이 중요하다.’라는 씨름의 기본원리를 보여준다. <씨름>의 또 하나의 묘미는 씨름을 관람하는 다양한 인물군상이다. 엿장수, 감자장수에서부터 어린아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고 있노라면 김홍도의 ‘씨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권은혜, 영화연구자)

  • Burning Brothers Burning Brothers

    군복을 입은 남자가 한 남자를 조심스레 뒤쫓는다.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곳은 그들의 관계처럼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묘연한 골목길이다. 숨죽여서 쫓아가는 남자와 쫓아오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남자. 이들은 프레임 인/아웃을 반복하며, 간격을 유지한 채 나아간다. 두 사람 이외의 어떠한 기척도 감지되지 않던 고요한 순간,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자신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커다란 몽키 스패너를 꺼내 앞서 가는 남자를 향해 돌진한다. 한 프레임 속에서 두 사람의 거리가 격정적으로 좁혀지던 그 때, 새로운 인물이 프레임 속으로 뛰어들며 군복 입은 남자를 골목 한 켠 어둠 속으로 낚아챈다. 쫓기는 것조차도 모르던 남자가 뒤돌아 보지만, 그의 시야 속엔 어둡고 미로같은 골목길 이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고깃집, 전역한 군대 고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휴가에 미복귀한 형과 복수를 제지한 껄렁껄렁한 동생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동생이 형에게 군대로 복귀할 것을 제안하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 대화는 필요 이상으로 주눅들어 있는 형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막말과 욕설로 형을 하대하는 동생이라는 관계를 지시하고 드러낸다. 또한 이 대화는 현재의 상황을 대하는 두 형제의 상이한 태도와 대화의 끝에 존재하는 어떤 변화를 암시한다. 동생은 형의 복귀라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군 복귀를 강변한다. 반면에 형은 현재가 아니라 자신이 안고 있던 근원적 문제, 일진이었던 동생과 관련된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이들의 대화는 각자의 입장을 전달하고, 이것이 교환될 수 있는 것처럼 오버 더 숄더의 쇼트/리버스 쇼트로 표현된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에 카메라는 과감하게 인물들의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이어지는 형과 동생의 측면 클로즈업이 교차되는 장면은 더 이상의 대화가 진행될 수 없음을 암시하며 전혀 다른 국면의 긴장감을 구성해낸다.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형제의 심리적 거리는 결국 ‘개싸움’을 경유한 신체의 접촉을 통해서 좁혀진다. 그리고 과격하면서도 유치한 형제의 싸움은 카메라에 의해 지속적으로 대립적 포지션에 배치되었던 두 사람을 유일하게 동일한 프레임 속에 위치시키는 역설적인 교감의 순간을 마련한다. ‘몸의 대화’가 끝난 이후, 형제는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박준용, 미쟝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Visit Visit

    부디 당신이 영화를 보기 전에 시놉시스를 읽지 않았기를. 영화에 퍼져 있는 따스한 불안을 가로막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박현용 감독의 <방문>은 처음 만난 세 사람이 한곳에 모인 이상한 긴장의 풍경에 집중한다. 저 멀리서 도망치듯 뛰어온 남자애가 미용실에 찾아오고, 미용실 아주머니는 아이가 누군지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를 환대한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아이, 미용실 아주머니, 그녀의 딸이 간간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영화는 철저히 세공한 리듬으로써 그 묘한 공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한다. 그녀가 아들은 학교에서 어땠니, 라고 물으면서 셋의 비밀은 점차 풀어진다. 직감적으로 그 관계가 좋은 일로 엮이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고 관객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 사이에 동참한다. 커피 포트에 물이 끓고, 물고기가 작은 어항을 맴돌고, 천둥과 함께 비가 내리는 걸 보여주는 대목은 <방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세 사람이 물로 인한 사건으로 모이게 됐다는 걸 이미지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밋밋하게 고조되던 긴장을 단숨에 끌어올린다. 평화롭던 무드가 어디 가겠나 싶다가도 순간 불안이 엄습하는 걸 피할 도리가 없다. "세상에 갇힌 고독한 인간과 창조주 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비밀이 얼마간 밝혀지고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영화의 두께를 재고해보게 한다. 다소 거창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 다만 영화 안에 퍼져 있는 단단한 호흡과 포근한 시선은 그 잠언 같은 말을 속는셈 치고 따라가고 싶게끔 하는 힘을 자랑한다.(문동명, 영화저널리스트)

  • The Last Resort The Last Resort

    한적한 시골 도로. 외제차와 경찰차가 추격전을 벌인다. 시골길의 평화가 무색하게도 고성과 욕설이 오간다. 그들이 발악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재휘 감독의 <발악>은 부임한 지 1년째 이렇다 할 사건 하나 처리해보지 못한 경찰이 여행 온 휴대폰판매원이 동네 형을 뺑소니 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오프닝의 추격전은 경찰이 뺑소니범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인 걸까. 맞다. 하지만 상황은 좀더 복잡하다. 경찰이 범인을 심문하는 사이, 세워놓았던 경찰차가 길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밟아버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경찰도 범인이 된 꼴. <발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 기묘한 살인이 어떻게 흐를지에 대한 예상을 가볍게 넘어서면서 관객의 집중을 붙든다. 경찰은 방황한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양심과 황당무계한 실수로 죄인이 될 수 없다는 불안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이 촌극을 상징하는 얼굴들을 드러낸다. 경찰에 비해 뺑소니범은 비교적 평면적인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그가 단 한시도 반성에 대한 여지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얕은 수로 이 위기를 빠져나가고자 애쓴다. '4만번의 구타'의 또 다른 경쟁작 <허도령>의 보험설계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선에 속하는 인물을 갈등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온다. 그리고 결국 악의 자리에 안착시키고 만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의 연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게 하던 영화는 톤을 유지하면서 끝내 무시무시한 파국을 제시한다. 웃음은 완벽하게 사라진다.(문동명, 영화저널리스트)

  • Catch Me Catch Me

    '몸'이 아니라 '묨'이다. 이현우 감독의 <묨>은 9분 남짓의 영화 마지막까지 묨의 정체를 알리지 않는다. 아파트 단지를 걷는 남자에게서 시작하는 영화는 그가 지나가던 길에 "귀엽네~" 위압적인 태도로 관심을 보이는 한 여자를 따라간다. 아파트 건물 아래서 웅숭크리고 있던 여자는 금세 경계를 발동하고 자연스럽게 공격의 태세를 갖추곤 줄행랑친다. 후디를 눌러쓴 옷차림에 어느 언어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얼핏 평범한 동네에 불시착한 A.I 같기도 하다. 함께 교차편집으로 붙는, 어떤 여자와 남자가 각각 무언가 다급히 찾는 모습을 보자니 더 그렇다. 특별출연한 김의성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 근래 악한으로 분한 영화들이 생각나서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후디 쓴 여자에 대한 위협은 끊이지 않는다. 몸집이 큰 남자 하나이기도 하고, 남녀가 섞인 무리이기도 하다. 그들을 대면하면서부터 <묨>은 돌연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와이어까지 활용한 고난이도의 동작들이 마구마구 이어질 땐 즈음엔 공들인 액션과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전개에 입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미스터리는 풀린다. SF와 액션의 외피를 쓴 영화는 교차편집되던 인물들이 드디어 만나면서 바로 현실로 돌아온다. 후디의 여자는 사실 고양이였고 이름은 (당연히) 묨이다. 고양이를 의인화해 거리의 고양이가 느끼는 위협을 그리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가능하다면 첫 상영에서 보고, 묨이 고양이인 걸 상정한 채 영화를 보길 권한다. 갸우뚱했던 대목들에 새겨진 디테일이 새삼 다르게 보일 것이다.(문동명, 영화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