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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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을 받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안녕, 부시맨> 김용천 감독

글 : 차민주 / 사진 : 이가영

어릴 적 놀이를 상상해보자. 소꿉놀이, 술래잡기, 인형놀이… 놀이를 하고 있노라면 그 세계 안에서만큼은 완벽하게 안전해지는 기분이 든다. 놀이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던 어린 마음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라버렸다. 여기저기 부닥치고 상처 난 어른들도 다시금 놀이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안녕, 부시맨>을 보고 있는 약 20분가량 동안 그 아릿한 세계를 만나볼 수 있었다. 신비로운 매력으로 우리를 ‘부시맨 놀이’로 이끈, 김용천 감독이다.

 

 

1. 지난 제2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무떼>로 미래상을 수상하신 이후, 약 15년만에 제18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 다시 한번 참가하시게 되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미쟝센 단편영화제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해왔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요. 거의 15년만이고, 저도 15년 동안이나 영화를 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또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규모가 더 커진 것 말고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자유로운 느낌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네요.

 

2. 영화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고등학생 때 만화를 좋아했어요. 만화를 그리다보니 학교도 그런 예술 쪽으로 가게 되었고요. 어쩌다보니 학교에서 영상을 만든 게 제2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거예요. 그 길로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된 거죠. (웃음) 본선에 진출도 되다보니 영화가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만든 영화를 좋아해 주시는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 뒤로도 꾸준히 영화 쪽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연출은 아니지만 여러 작품에서 스토리 보드 작가로 일을 하기도 했고요.

 

3. 4만번의 구타(액션, 스릴러)에 참가했던 <무떼>와 달리 <안녕, 부시맨>은 드라마라는 장르에 더욱 가깝습니다.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딱히 장르를 구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맥락 상에서의 영화 장르를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무떼>라는 액션 영화를 찍게 된 것도, 단순히 제가 액션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동아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특정 장르를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되고 나서, 장르가 입혀져서요. 이번 영화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장르가 구분이 된 겁니다.

 

 

4. ‘나는 부시맨을 위한 영화를 언젠가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라는 연출의도를 읽었습니다. 감독님께 ‘부시맨’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초등학교 2~3학년 즈음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때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거든요. 저는 매일 혼자 있었어요. 대신 부모님께서 일을 나가시기 전에 비디오를 빌려 놓고 가셨거든요. 부시맨, 로보캅, 블레이드 러너 같은 장르 영화를 혼자서 많이 봤어요. 특히 부시맨 영화를 제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모니터가 저를 외롭지 않게 해주던 친구였던 거죠. 그때는 부시맨이 가짜인 것도 몰랐어요. (웃음) 그러다가 고등학교 2~3학년 때인가, 전철 타고 학교를 가는데 신문에 부시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실려있더라고요. 순간 옛날 기억이 떠오르면서, ‘부시맨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더라고요. 그 생각을 지금까지 쭉 간직하고 있다가, 약 20년만에 영화를 만들게 된 거죠. 부시맨은 참 애틋한 존재예요.

 

5. 영화에 등장하는 ‘부시맨 아저씨’의 캐릭터가 매우 특이해요. 사회로부터 도외시된 인물이라 하면 피폐하고 망가진 모습이 강조되는 것이 전형적인데, 이 아저씨는 순수하고 맑은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러한 인물상으로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사회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규정 지어지지 않은 사람’의 상태가 무엇인지 고민했어요. 그래서 부시맨 아저씨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설정을 하지 않았어요. 사회적/경제적 위치를 벗어나서 아예 백지 상태가 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순수한 인물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 이 사람을 순진하고 착한 인물로 설정한 건 아니지만요. 물론 실제 사람을 사회적 기억으로부터 포맷시킬 수 없지만, 영화니까 한번 해봐야겠다 싶었죠. 사실 그러다보니까 애매해지기도 했어요. 영화상에서 선택적인 능력이 결여되니까 힘들더라고요. 행동을 해야 하는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그 행동에 선입견을 씌우는 경우가 파다하잖아요. 그래서 부시맨 아저씨에게 특정한 행동을 주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아이들의 행동에 이입하는 것으로 설정했어요. 영화를 보시면 부시맨이 애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느낌이 강할 거예요.

 

 

6. 부시맨의 뒷이야기나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맡겨진 현실 세계보다 ‘부시맨 놀이’라는 세계가 전경화 되는 듯했는데요. 이렇게 의도한 이유가 있다면?
백스토리를 처음부터 안 만들었어요. 만들면 대사든 뭐든 전반적으로 영향을 줄 것 같아서요. 포괄적으로 어른들에게 있어서 안 좋은 일이란 뭘까, 생각을 해 보았는데 너무 많은 일들이 있더라고요. 애들도 그렇고요. 어른들이 모르는 아픈 일들이 아이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한 사건이 규정지어진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의 행동을 보고 ‘고작 저런 거 가지고’, 라든가 ‘나도 저랬지’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어요. 사건이 너무 고착화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명확하게 설명을 하지 않고 안 좋은 일이라는 느낌만 남겨두었어요. 각자의 아픔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셋이 노는 것 자체에 집중시켜주고 싶었어요. 때문에 백스토리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고, 노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려 했어요. 셋이서 어떤 놀이를 할 건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죠.

 

7. 영화 초반부에서, 어른의 시선을 전부 지우고 아이의 시선만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이 얘기를 하려면 어른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른들은 고착화가 되어 있어요. 이런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갖고 있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요. 반면 아이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죠. 그래서 아이들 시선만을 두고, 어른들의 간섭이나 존재감을 지우려 했어요. 백스토리 이입이 안 되도록 차단을 많이 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영화 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도 어른들이 등장할 때만 발생해요. 경찰이 나오는 장면도 그렇고, 아줌마가 발견하는 장면도 그렇고요. 아이들이 있을 때는 순수하게 놀기만 할 뿐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요.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어른이 ‘넌 이제 중학교 가야 돼, 이제 고등학교 가야 돼’라고 시킴으로써 가능성이 닫혀지고 고착화된다고 생각해요. 어른의 존재를 배제시키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생각하면 부럽기도 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도 돼요. 저도 아이를 잘 몰라서. (웃음)

 

8. 영화에 등장하는 형제도 눈에 띕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형’은 굉장히 의젓하고, 부모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물인 것 같았어요. 반면 ‘동생’에게 서사의 포커스가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는데요. 이러한 형제를 등장시킨 이유가 있다면?
원래는 등장인물이 한 명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어린 아이를 등장시키면 이야기상 진행이 안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나이가 너무 많아버리면 어느 정도 이성이 자라 있을 테니까 부시맨 아저씨랑 같이 노는 게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래서 둘을 분리시켰어요. 형은 동생보다 이성적이고 의젓하지만 철이 없는 인물이에요. 때문에 가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같이 놀 수 있는 거죠. 어린 동생은 형보다 아저씨를 모르지만, 아저씨와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만드는 역할을 담당해요. 동생이 부시맨을 발견하고, 동생이 부시맨 테이프를 가져가고. 그래서 시선이 동생에게 좀 더 많이 갔던 것 같아요.

 

9. 부시맨이 빠진 이를 던지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누군가가 나를 찾으러 올 거라는 외로운 기다림을 이가 상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를 던지는 부시맨의 심리와, 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동생의 심리가 궁금해요.
어른이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라는 생각에 그 장면을 넣게 되었어요. 어릴 때는 이빨을 던지면 이빨이 새로 난다는 이야기를 모르잖아요. 엄마 아빠나 어른을 통해 그 이야기를 알게 되죠. 그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되는 순간, 그게 바로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보살핌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이’라는 오브제 자체를 부시맨 아저씨와 동일시하려 했던 의도도 있어요. 부시맨 아저씨는 숲 속에 이빨 하나 덩그러니 남겨진 모습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산 속에 이런 오브제를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누군가 기억해주지 않을까. 그런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거죠. 이런 생각으로 이가 풀잎 위에 놓인 샷을 넣었고, 이 외의 이미지 배치나 시퀀스를 만드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10. 결말부에서 부시맨이 아이들이 준 옷을 입고 홀로 부시맨 놀이를 하는 장면이 길게 남더라고요. 영화가 아이들의 시점에서 시작했지만, 결말에서는 부시맨이 아이들을 회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러한 결말을 선택하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일단 이 사람들이 만났으니까 헤어져야 하는 상황을 넣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 씬을 만들었어요. 근데 그냥 헤어지면 좀 심심하잖아요. 아이들도 정이 쌓일 대로 쌓였고. 그때 애들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봤어요. 부시맨 아저씨는 벌거벗고 있는 데다 혼자 있으니 심심해 보이잖아요. 그러니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주는, 그런 아이 같은 행동을 할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에 옷을 입혀봤죠. 근데 느낌이 뭔가 신기한 거예요. 아이들이 그 아저씨를 부시맨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다시금 사회화된 현대인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인 거잖아요. 완벽히 의도한 건 아니고 편집할 때 그런 신기한 느낌을 살리려고 했어요. 특히 시골이라는 배경에서, 혼자 남겨진 사람이 떠난 사람의 흔적을 붙잡고 회상하는 건 굉장히 애틋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지막에 남자가 아이들을 회상하는 모습을 찍고 싶었어요. 실은 찍어놓고 편집에서 삭제했는데, 신기한 느낌이 없어지더라고요. 애매모호하고 신기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다시 추가했어요. 덧붙여서,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게 사실 다 과거의 것들이에요. 비디오 테이프도 옛날 거고요. 지금이 아닌 옛날에 대한 것들, 옛날 사람이나 옛날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항상 하는 거 같아요. 부시맨에 대해 추억이 된다고 볼 수도 있을 거고요.

 

11. 비정성시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얘기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부시맨의 만남은 진한 여운을 남기는데요. 둘의 만남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서로 위안이 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상시에는 어른이랑 아이랑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요.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 비현실적이지만, 아이가 어른한테 위안을 주고 어른도 위안을 받고 헤어지게 되는 짧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이 너무 삭막하잖아요. (웃음) 그래서 숲이라는 공간을 고집한 것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관여가 없는 장소인 숲에서 두 부류의 존재들이 만나 위안을 받는 과정을 보시고, 관객들도 함께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다들 일하러 가야 하잖아요. 지치는 일상일 텐데,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따뜻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12. 본인만의 영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중요한 것 같아요. 항상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해요. 천재지변이든 촬영이든, 뭔가를 행하면서 사람을 잃거나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화가 잘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없어요. 영화 자체가 아니라, 스텝이나 배우나 주변 사람들이 우선 순위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규정짓지 않으려고 해요. 액션, 사회적인 관점의 이야기, 공포까지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고찰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하고 싶은 걸 새롭게 시도하면서 다양한 장르와 접목되는 것 같아요.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장르에 관한 영화제이긴 하지만, 감독을 정말 장르로만 규정지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들고요.

 

13.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신가요? 차기 계획이 있으시다면?
사실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차기작으로 SF를 찍고 싶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항상 생각한 대로 못 찍고 있더라고요. 이번에도 사회드라마 류의 영화를 찍어버렸네요. (웃음) SF를 찍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어요. 그때 얘기했던 아이디어나 컨셉도 계속 생각은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다보면 <안녕, 부시맨>을 만든 것처럼 언젠가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4. 김용천 감독님께 단편 영화란?
사실 사람들이 돈을 내고 극장에서 단편영화를 보려고 하지는 않잖아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영화에 상업적인 요소도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단편영화와 같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단편영화는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있어야만 할 것 같아요.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고, 또 해야 되는 것이죠. 상업영화로 흥행에 성공하신 감독님들 중에서도 가끔 단편을 찍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분들이 존경스러워요. 상업적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걸 단편으로 표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들인 것 같거든요. 그런 분들을 닮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단편을 찍고 싶어요.

 

 

아이들이 선물한 옷을 입은 채 홀로 화살을 쏘는 부시맨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우리는 다시금 부시맨이 아닌 어떤 이름과 직위를 가진 채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아이’를 잠깐이나마 확인했다는 느낌만은 길게 남았다. 어쩌면 ‘부시맨 놀이’는 어른들을 위한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김용천 감독의 조금이나마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말과 그의 영화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위안이 가득한 이 작품을 스크린에 두고 나올 때, 건넬 수 있는 인사는 이뿐일 테다. 안녕, 부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