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어떤 배우는 보여주는 것, 들려주는 것 그 이상의 연기를 한다. 그런 연기는 시각이나 청각 등의 익숙한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피부로 다가오고 마음으로 스며든다. 박가영 배우의 연기가 이미지로 기억되지 않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녀가 스크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 되고 일상이 된다. 그녀가 연기한 만삭의 지원은 우리 주위의 평범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집안의 묵직한 공기와 인물 간의 미세한 기류까지 온몸으로 체화해내며 관객의 감상을 한 차원 깊은 곳으로 끌어들인 <서스피션>의 박가영 배우를 만났다.
이번 작품으로 미쟝센 단편영화제를 찾으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배우 일을 시작하기 전에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준비를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빡빡한 스케줄로 수업을 들으면서 유독 힘든 날이 있었는데 그때 직접 티켓팅을 해서 본 영화가 김의석 감독님의 <구해줘!>였어요. “누군가에게 즐거운 하루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라는 연출 의도처럼 그날 저의 상황에 굉장히 힘이 되고 즐거움을 주는 영화였어요. 이렇게 관객에서 출발했던 미쟝센 단편영화제에 제가 주연으로 이끌어가는 작품이 상영돼서 정말 기뻐요.
지원이 어떤 인물인지 배우님께서 직접 소개 부탁드려요.
지원은 결혼을 한 여성이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집이라는 공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에 놓여있어요. 그런데 가장 가까이에 있고, 또 지금으로서는 제일 중요한 존재인 남편이 사건에 휩싸이면서 심리적으로 복잡한 감정을 겪는 인물이에요.
맨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사실은 막막했어요. 이전에 임산부 역할을 해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만삭이잖아요. 그런데 남편은 살인자로까지 몰리게 되고, 지원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와 가정을 지켜야 해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인물일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마침 그 당시 제 주위에 아이를 임신하거나 출산을 앞두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안 돼?” 이러면서 다들 그 상황에 몰입하는 거예요. 주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이입을 하는 인물이니까 나도 이런 역할에 대해 준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산부 역할인 만큼 연기하실 때 감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면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준비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임산부 배의 형태와 똑같은 모형이 많이 제작되어 있더라고요. 배꼽의 형태까지 아주 디테일 했어요. 촬영 전에도 그걸 착용해서 계속 연습하고, 촬영할 때도 밥 먹을 때 빼고는 계속 하고 있었어요. 친구들한테 자문을 구하기도 했고, 영상도 많이 찾아봤지만 자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행동들이 있더라고요. 모형 자체가 진짜 무거웠거든요. 다리도 막 퉁퉁 붓고, 힘들어서 계속 눕고 싶었어요. 그때 정말 임신한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어요.
연기할 때 주변 분들에게 자문을 많이 구하시는 편인가요.
맡은 역할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우선 감독님으로부터 그 인물이 나왔기 때문에 감독님께 가장 많이 여쭤보면서 시나리오 속의 인물과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계속 좁혀나가는 과정을 거쳐요. 이번 역할처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은 아무래도 주변에 도움을 많이 구하는 편이에요.
영화 초반에 보증금 문제로 집주인이 찾아왔을 때 지원은 참아왔던 걸 한꺼번에 터뜨리듯 쏘아붙이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정작 상대방의 눈은 쳐다보지 않아요. 이런 디테일한 연기는 배우님의 아이디어였나요.
그 장면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디렉팅을 주지는 않으셨고, 저도 계획적으로 하진 않았어요. 지원에게는 일단 집주인이 많이 불편한 대상이잖아요.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제 배를 만져요. 피하고 싶은 대상이고 불편한 존재인데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죠. 저는 딱히 계산하지 않고 그냥 그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앞서 말한 그 장면을 제외하고는 지원은 주로 대사보다는 표정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인 것 같아요. 남편을 추궁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혼자서 모든 의심을 짊어져요.
일단 이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지원밖에 없고, 남편을 향한 의심들을 안고 있는 와중에도 곧 엄마가 될 사람이잖아요. 남편이 그랬으면 어떡하지 싶으면서도 범인이면 안 될 텐데 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극중에서도 흔적들을 지우는 작업을 해요. 물리적으로 정말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혼자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만약에 배우님께서 지원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 것 같으신가요.
으아 그런 상황이 안 오면 안돼요? (웃음) 저는 평소에도 박우건 감독님께 그때그때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을 자주 드렸어요. 감독님께서 배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시고 소통해 주시는 분이셨거든요. 현장에서 느끼는 미세한 감정 변화들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는데 아마 저여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극중 남편이었던 황상경 배우님과의 호흡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저는 상경 선배가 너무너무 좋아요. (웃음) 선배한테 정말 감사했던 게 영화에 행복한 장면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심지어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 NG가 날 정도로요. 제가 표현을 많이 하진 못했는데 상경 선배가 정말 재밌으세요. 현장에서 다들 물리적으로 지쳐있으면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가 힘을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저는 가끔 지원의 행동에 대해 고민이 생길 때 분명히 마음으론 알겠는데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이걸 감독님한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지 고민에 빠져 있으면 옆에서 선배님이 정확히 캐치를 해주시는 거예요. 선배님께 정말 많이 배웠고 또 너무나 감사했어요.
영화의 후반에 이르면 지원이 만삭의 몸을 이끌고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청소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과정이 별다른 대사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데 어떤 감정을 담아서 연기하셨는지 궁금해요.
솔직히 일단 너무 힘들었어요. (웃음) 그렇지만 지원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이걸 해야만 하는 상황이잖아요. 현장에서 연기를 할 때도 정말 힘들었지만 빨리 해결해야 된다는 마음이 앞섰어요.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원 자신을 위한 행동이기도 하니까요. 남편을 의심하면서도 남편이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컸거든요.
영화는 사건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지원이 남편의 셔츠를 또다시 꺼내어 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돼요. 지원은 언제쯤 남편을 향한 의심의 잔여물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지원이 그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있었던 일을 쉽게 잊지 못하잖아요. 특히나 좋지 않은 일일수록 더욱 잊기 힘든 것 같아요. 잊고 산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무언가 상징적인 걸 보면 결국에는 생각이 나곤 하니까요. 앞으로도 지원이 일상 속에서 그 일을 자주 품고 살진 않겠지만 어느 날 문득문득 떠올리게 될 것 같긴 해요.
배우님께서는 이번 작품에서 집안의 공기마저 온몸으로 체화해낸 굉장히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주셨어요. 지원이 되기 위해 인물에 어떻게 접근하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지 라고 계산을 하진 않았고 그냥 그 공간 속에 그리고 그 상황에 잘 머무르는 편인 것 같아요. 지원이라는 인물과 저와의 간극을 좁히면서 체험을 하는 방향이었어요. 그리고 영화의 톤과는 다르게 현장 분위기가 너무 밝고 즐거워서 오히려 연기할 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촬영장에 평화로운 기류가 흐르다 보니까 슛 들어갈 때 더욱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현재 어떠한 갈증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장르가 있으신가요.
일단 지금은 계속해서 경험을 많이 해나가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을 잘 해내는 게 첫 번째 목표예요. 그렇지만 약간의 갈증이 있다면 요즘 건강과 신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어서 운동을 하거나 몸을 쓰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자연과 밀접한 이야기, 사람 냄새가 나는 따뜻한 이야기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배우님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연기를 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배우 일을 하기 전엔 특별한 꿈이 없었어요. 그저 1년씩 무언가 새로운 일들을 해나가는 과정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단편영화를 찍게 됐는데 그때는 내가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연기를 멈췄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뭔가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건 이 일이 유일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위기들은 계속 있죠.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이 있고.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할 거야 분명히 그랬는데 또 다음 작품 하고 있고. (웃음) 그런 상황이 이상하게 계속 벌어지더라고요.
관객들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음… 저는 가늘고 길게 (웃음) 제가 필요한 곳들에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좀 옆집 사람 같은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독립영화 상영하면 영화 보러 극장에 와주시는 마니아 관객분들이 계시잖아요. 영화제 다니면서 서로 인사하고 그러면 정말 아는 사람들 같아요. 그럴 때 너무 감사하죠. 그래서 저는 편하게 서로 안부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반가운 얼굴로 기억되고 싶어요. 자연스럽고 크게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때그때의 인물들로서 기억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시나요.
미팅 중인 작품들은 있지만 아직 차기작이 명확히 결정된 건 없어요. 올해는 외부적인 상황들도 그렇고 저에게도 정비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찬찬히 산책하듯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요즘엔 새로운 취미생활로 미싱을 시작했거든요. 미싱 소리가 희열이 있더라고요. (웃음) 또 한동안 오래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건강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끝으로 박가영 배우님께 단편영화란?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길이의 한 편의 영화! 그래서 한 편의 작품으로서 조금 더 존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단편영화는 저를 많이 발견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우연히 단편영화를 찍게 되면서 제 삶이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스틸컷 사진은 배우님께서 직접 제공해주신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