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OFFICIAL DAILY04

“쓸 수 있는 것은 다 써보자 하는 마음이었어요.”

글 : 황정민, 한지나 / 사진 : 김정은

한 쌍의 남녀가 공항 근처 논두렁을 배회한다.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한없이 논두렁만 걷는 그들에게는 막대한 꿈이 있다. 바로 달에 가는 것. 하지만 그들에겐 거대한 우주선도, 최첨단 우주복도 없다. 그들이 달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은 2009년에 개봉했던 작품 <달세계 여행>의 이종필 감독을 만나보았다.

 

 

 

Q. <달세계 여행>으로 미쟝센 단편영화제 20주년 기념 프로그램 ‘Outside the 20’을 빛내주었다. 소감이 궁금하다.

 

10년도 더 전에 만든 영화를 극장에서, 특히 코로나 시대에 관객분들이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더불어서 내가 이전에 연출했던 단편 영화가 있었는데 보기 좋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더욱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돼서 너무 좋다. (웃음)

 

 

 

Q. 말하지 않고도 대화가 가능한 두 남녀의 이야기라니 정말 창의적이고 재밌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상상력의 출발이 궁금하다. 또 연출 의도가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라고 나와 있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이전에 찍은 단편영화가 있었는데 미국의 도어스(The Doors)라는 록 밴드의 리더였던 ‘짐 모리슨’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그 작품이 운 좋게 모 유럽 영화제에 상영돼서 처음으로 유럽을 간 적이 있다. 유럽에 간 김에 파리를 가보고 싶었고 그곳에 있는 페르라세즈 무덤가에 짐 모리슨 무덤이 있어서 인사하자는 심정으로 갔다. 그때 계속 다음 작품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른 구역을 가다가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두상을 봤다. 그리고 숙소에 있는 에펠탑에 관한 관광 책자에서 1900년대쯤 양복을 만드는 재단사가 하늘을 날기 위해 에펠탑에서 뛰어내리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맞다. 감독님의 영화에도 등장한다.

 

그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유성영화 한 편을 삽입한 걸로 아는데 필름으로 다 찍은 거다. 아무튼 그걸 보면서 ‘달세계 여행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에펠탑에서 뛰어내리는 남자가 궁금하진 않았고 이 한심한 인간을 지켜보는 여성의 마음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특별한 SF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벌려서 찍은 거다. 프랑스 배경 세트도 다 지었다. 근데 찍다 보니 예산도 부족하고 좌절하는 순간도 왔다. 그 후에는 최소한의 요소만으로 영화를 완성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예리 배우와 최시형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소규모로 찍기 시작했다. 그게 영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Q. 영화의 연출 의도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린다.

 

그 당시 나이가 29살이었고 영화 학교를 졸업해야 할 시기였다. 마치 하나의 챕터가 끝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영화를 찍으면서 되게 즐거웠다. 최시형 배우와 한예리 배우와 같이 찍는데 정말 재밌었다. 그와 동시에 ‘이 즐거움이 지속되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의 마지막이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는데 ‘좋은 것들이여 안녕’이라고 쓸 수는 없으니까 (일동 웃음). 그래서 그 문장을 연출 의도로 정했다.

 

 

 

Q. 영화 중간 중간 영상이 멈추고 애니메이션이나 8mm 영상이 등장하는 게 독특하다. 이런 연출을 시도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지금 보면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당시에는 허영심으로 인해 그랬던 것 같다.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영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은 다 써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8mm, 16mm, 35mm, 캠코더 등을 다 활용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편집을 하고 완성되면서 허영심의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만들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변수들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최초에는 8mm 필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어느 날 두 사람이 지구에서 사라졌고 시간이 지나서 누군가 우연히 8mm 필름을 발견했을 때의 기록 같으면 어떨까 하고 시작한 건데 8mm 필름으로는 부족했다 (웃음). 그래서 공항도 가고 캠코더로 찍기도 했다. 사실 그게 끝인 건데 한예리 배우가 전화해서 뭐 좀 더 찍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엔딩을 컬러로 시장에서 찍고 한예리 배우도 준비를 잘해왔다. 그래서 그날 와서 그렇게 찍은 거다.

 

 

 

Q. 두 남녀의 직접적인 대화 장면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검은 화면에 나레이션만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의도였는지 궁금하다.

 

당시에는 소리에 집중하고 싶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20대 초반, 어렸을 때 누군가와 연애를 하면서 가장 큰 기억은 밤에 불 끄고 통화할 때 같다. 배경은 깜깜하고 상대방과 나의 목소리만 서로 오가는 느낌을 한 번 구현해보고 싶었다.

 

 

 

Q. 두 인물의 감정과 함께 따라가는 듯한 거친 카메라 워킹이 인상적이다. 또 두 인물이 처음으로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는 카메라에 물방울이 맺혀있는데 전반적인 촬영 방식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일단 그 장면을 찍을 때는 우리 셋밖에 없었다. 배우 두 명이랑 내가 촬영을 했던 것 같다. 찍다 보니까 비가 왔다. ‘비가 와서 좋다’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카메라에 대한 걱정이 컸다. 의도해서 거칠게 찍은 건 아니고 내가 숨이 거칠었던 것 같다. 즉흥성에 비중을 두고 배우들에게도 최소 3초에 한 번은 액션 리액션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또 그런 것을 잘 담아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인해 삼각대 없이 거칠게 됐던 것 같다.

 

 

 

 

Q. ‘예리’는 오로지 ‘형근’을 바라보고 달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형근’은 자신이 달에 가자고 말한 것도 기억을 못하고 심지어 미안해서 혼자 가겠다는 말까지 한다. 이들의 달 여행이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가 궁금하다.

 

이게 요즘 패러다임으로 생각하면 뒤떨어진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길을 가면 여자는 기다리는 옛날 사고방식처럼 쓰여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썼냐면 두 사람을 남녀, 연애뿐만 아니라 사람의 다양한 내면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에서 양조위 배우의 역할은 나를 경계로 세상과 만나는 느낌이 있었고 장국영 배우는 나를 경계로 내 안에 있는 온전한 나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 관계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연애도 그렇다. 둘이 잘 맞는 것 같다가도 계속 같이 있으면 차이가 드러난다. 그런 것들이 닿지 않았나 싶다.

 

 

 

Q. 달로 가기 직전 ‘우리가 날아가는 게 아니라 달이 우리를 끌어들이는 거야’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마치 달 여행은 필연이자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의미를 담은 대사인가.

 

이 둘이 어쨌든 달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게 말이 되나’하는 생각도 있었다. 말이 안 되면 시적 언어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고민하다가 대사가 나온 것 같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그게 장소든 사람이든 자석처럼 끌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대사인 것 같다.

 

 

 

Q. 영화 내에 또 다른 영화 ‘LE VOYAGE DANS LA LUNE’가 등장한다. 동명의 영화인 최초의 SF 영화 ‘달세계 여행’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의도가 궁금하다.

 

그런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그 시절 영화처럼 크랭크 카메라로 손으로 35mm를 돌려서 찍는 방법을 똑같이 구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원래 의도는 그 영화를 더 오래 넣으려 했는데 안되겠다는 판단이 서고 다시 단편으로 구성하면서 몇 장면은 꼭 넣고 싶었다. 이때 나는 학교를 졸업하는 입장이어서 더 이상 영화를 안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가졌었다. 영화와 이별하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보면 너무 좋고. 그래서 영화 속 영화를 넣고 싶었고 그것이 이런 무성영화를 재현한 고전적인 느낌이면 이런 개념이 옛날 영화의 추상성과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Q. 마치 밀랍 인형 같은 달지기 ‘프란시스’가 등장하며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긴다. ‘프란시스’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가 있다. 오프닝에서 뜬금없이 풍금이 도착하고 아담 샌들러 배우가 그걸 들고 간다. 나도 어느 날 새벽에 프란시스를 들고 뛰었다. 집에 두고 있다가 이걸 어딘가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29살의 나에겐 큰 인형 같은 존재였다.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달에 갔으면 뭐라도 나와야 하지 않나. 뭐가 있을까 하다가 뜬금없이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상징하진 않고 ‘예리’와 ‘형근’이 한 사람이면 프란시스는 타인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Q. 마지막 장면은 두 남녀가 시장에서 거리를 둔 채 국수를 먹고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둘의 첫 만남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행에 다녀온 후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그 당시에 한예리 배우에게 3초에 한 번씩 액션 리액션을 해줘야 한다는 얘기를 해서 계속 무언가를 했다. 한예리 배우는 말도 안 되는 얘길 해도 그대로 다 해준다. 그런 상황에서 비롯된 거고 사실 맥락으로는 당시에 인과관계를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는 느낌을 받길 원했다. 원래 마지막에 둘이 고개를 들면 달이 2개 떠 있는 엔딩도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의도했던 것은 사실 둘이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느낌을 받길 원했다. 특별한 결말을 바랐던 것 같다.

 

 

 

Q. 영화 내내 한예리 배우의 꾸며내지 않은 연기가 인상적이다. 감독님과 한예리 배우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한예리 배우를 캐스팅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선배 영화 <기린과 아프리카>에서 논두렁 장면이 나오는데 <달세계 여행> 배경과 동일한 곳이다. 내가 추천을 해준 장소다. 그 영화에 한예리 배우가 나오는데 포토제닉 한 느낌을 받았고 출연 제안을 했다. 근데 그 당시에 한예리 배우가 일이 굉장히 많았다. 근데 돌아온 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욕심을 내도 될까요?’였다. 너무 좋았다. 너무 좋은 배우다.

 

 

 

Q. <달세계 여행>을 찍기 전에 선배나 동기분들의 독립영화에 배우로 출연하신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이 배우들에게 디렉팅을 할 때 도움이 됐는지 궁금하다.

 

디렉팅에 도움이 된다기 보다 디렉팅을 하지 않는다.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쓸데없는 얘기를 안 하는 것 같다. 밖에서 얘기를 안 한다. ‘여기서 웃겨줘’, ‘여기서 멋있게 해줘’ 이런 지시가 있으면 배우가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Q.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대한 관객 반응 중 인상 깊었던 평을 얘기했다. 혹시 <달세계 여행>에 대한 반응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평이 있나.

 

거의 평을 못 본 것 같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한예리 배우의 희귀작? (웃음) 근데 결이 좀 다른 것 같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대중들에게 와닿기를 바랐고 많이 보시길 바랐다. <달세계 여행>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은 없다. 미쟝센 단편영화제를 통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Q. 늦었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수상소감에서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걸까’라는 질문에 관객분들이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성장하고 있다는 긍정의 답을 주셨다고 했는데 앞으로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없다. 영화의 종류도 워낙 많고 어떤 영화를 할지도 봐야 한다. <달세계 여행>은 내 작업으로써의 영화라고 생각하고 <삼진그룹 토익반>은 직업으로써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내가 이런 얘길 하고 싶다 이런 것은 없고 다만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할지는 고민한다. 막연하게 혼자 생각했던 것은 새로운 것 혹은 잊힌 것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중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영화로 해보고 싶다.

 

 

 

Q. 감독님에게 ‘단편영화’란?

 

그냥 말 그대로 짧다, 짧을 단(短)이다.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면 ‘짧은 사람’인 거다. 여기서 짧다는 건 키나 혀를 의미하진 않고 그냥 짧게 만난 사람, 짧게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 이 사람과의 만남이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사람.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다. 만남은 짧지만 오래 기억되는 면도 있다. 그런 개념이 단편영화인 것 같다.

 

 

<달세계 여행> 속 많은 장면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이 의문을 굳이 기를 써서 해결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생긴 의문은 곧 영화의 개성이 되고, 작품을 확실히 각인시킬 요소로 작용한다. <달세계 여행>의 독특한 구성과 몽환적인 사운드, 신비로운 화면 역시 영화를 관객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개성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