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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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저 문을 열고 싶었어요. <판문점 에어컨> 이태훈 감독

글 : 조수경 / 사진 : 허은

눈을 감고 잠시 상상해보자. 당신은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통하는 공간에는 에어컨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곧 문이 닫히고 만다. 꽉 막힌 공간에는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다. 금세 답답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문을 열면 쉽게 누릴 수 있는 시원한 바람이건만, 우리는 왜 문을 닫아놓고 있는가.

판문점 T2의 문도 꽉 닫혀있다. 하지만 닫힌 문을 과감히 열어 버리는 영화가 있다. 판문점에 시원한 평화의 바람이 불게 하는 영화, <판문점 에어컨>의 이태훈 감독을 만나봤다.

 

에어컨 수리기사가 판문점의 에어컨을 고치러 간다는 상상이 재미있었습니다. <판문점 에어컨>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와 함께 각본을 쓴 양광운 작가님이랑 사진 한 장을 보게 됐는데요. 실제로 S사 에어컨 실외기가 판문점에 있는 사진이었어요. 그 사진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아요. ‘왜 에어컨이 판문점에 있을까?’, ‘저게 고장이 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바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요. 이렇게 끝도 없이 생각하고 물음에 답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작업한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는데, 공동집필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양광운 작가님과 대부분의 각본을 함께 작업하고 있는데 너무 잘 맞아요. 공동 작업을 한 지도 몇 년이 됐고요. 물론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의견이 충돌했을 때 서로의 감정이나 인격적인 부분을 건드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자신이 얼마나 좋은 자료를 준비했든 간에 상대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항상 그 부분을 취하려고 해요. 작가님을 만나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6월 30일, 정전선언 66년 만에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남북한의 상황은 손바닥 뒤집듯 변하기도 하는데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으로 인해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를 촬영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썼어요. 평화회담 이후 갑자기 남북한에 평화의 물결이 흐르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영화가 필요 없는 것 아닐까 고민했었어요. 현실이 평화롭다면 이 영화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영화는 그 자체만의 매력이 있고 할 수 있는 역할도 많으니까. 남북 정세에 대해서는 참고하되, 우리 이야기는 처음부터 지향한 길로 가자고 마음을 다잡게 됐죠.

 

 

판문점과 관련한 정보는 쉽게 얻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 작업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관련 자료는 어떻게 수집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도서 중에 ‘판문점 리포트’라는 책이 한 권 있어서 그 책을 읽었어요.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남북 관련 영화도 다 봤고요. 하지만 판문점을 직접 다룬 영화는 없어서 판문점 출신 군인들을 인터뷰하게 됐어요. 남한군 분대장으로 출연한 배우도 실제 JSA 출신이세요. 북한말 자문을 해 주신 백경윤 선생님께도 세세하게 확인을 받으며 진행했고요.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됐죠.

 

북한 간부 역할을 맡으신 배우님이 북한 사투리를 잘하시던데, 북한 사투리는 따로 강습을 받은 것인가요? 어떻게 디렉팅을 하셨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저도 아직 부족한 감독이라 연기에 대해서는 배우들을 믿는 편이에요. 맡은 역할은 배우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북한말의 경우는 백경윤 선생님께 자문받았습니다. 북한말도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서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사건이 얼추 마무리된 후에도 티격태격 싸우는 남북한 군인에게 철환은 “이제 그만들 좀 하세요.”라고 말해요. 이 대사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따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준비하기 전까지 남북한 문제와 동떨어져 있었다고 생각해요. <판문점 에어컨>을 통해 통일에 대한 생각도, 남북한에 대한 생각도, 스스로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됐어요. 철환은 이런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철환은 영화에 나온 인물 중에서 저희가 가장 쉽게 대입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잖아요. 철환이 내뱉는 ‘금방 끝날 것’, ‘그만들 좀 해라’와 같은 대사는 우리가 이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넣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양쪽 문이 활짝 열린 회의실에 시원한 자연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통하는 공간에는 인공적인 바람을 만드는 에어컨이 필요 없죠. 마지막 장면을 바람으로 연출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에어컨은 미국과 중국 등 국제적인 부분이 얽혀있는 상징으로 사용됐어요. 그러한 에어컨에서 나오는 인공적인 바람, 이 바람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거기서 더 발전해 ‘문’이라는 것에 포커스를 두게 되었어요. 문을 열면 바람이 느껴지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판문점 T2라는 건물의 양쪽 문은 동시에 열린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남측에서 들어가면 북측 문을 닫아야만 하고, 북측에서 들어오면 남측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이곳의 규칙이에요. 그래서 더 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본인만의 영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영화 철학을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햇병아리라서. (웃음) 그냥 관객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영화, 그들의 마음에 남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자칫하면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만드실 영화도 기대되는데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으신가요?
당장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정된 것은 없는데. 준비는 늘 하고 있어요. 사실 <판문점 에어컨>을 만들기 전에 다른 것을 기획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판문점 에어컨> 소재가 갑자기 찾아오더라고요. 어떤 것이 또 찾아올지 몰라서 항상 촉을 세우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감독님께 단편영화란?
단편영화는 단편영화죠. (웃음) 하지만 다른 표현을 해야 한다면 단편영화는 잠시 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잠시 현실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것을 경험하고 돌아오잖아요. 그러면서 현실에서 마주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도 하고, 감정을 새롭게 느끼기도 하고요. 쉽게 말해서 단편영화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인 거죠. 그래서 단편영화는 잠시 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원한 자연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는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다. 판문점 T2에 필요했던 것은 에어컨 수리가 아니라 단지 닫혀있던 양쪽 문을 여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굳게 닫혀있는 저 문을 열면 자연스레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판문점 에어컨>을 통해 함께 문을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