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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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만날 수 없었던 모든 인연들에게 바치는 이야기, <주우와 한별> 정해성 감독 인터뷰

글 : 김서영 / 사진 : 이승현

가족, 친구, 연인, 등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낸 이번 제16회 미쟝센 단편 영화제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섹션에서,

사랑 고백은 커녕 제대로 된 대화 한 마디 나누는 장면 하나 없이 큰 울림을 남긴 조금 특별한 영화가 있다.

바로 고등학생 ‘주우’와 취업준비생 ‘한별’의 이야기를 다룬 19분의 다소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 <주우와 한별>이다.

24시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해 담당 형사에게 보내는 탈북자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남한을 사랑합니다>,

뺑소니로 사람을 치어 죽인 후 그 시체를 직접 찾아나선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내가 했습니다> 등 독특한 내러티브와

남다른 연출력으로 주요 독립영화제에서 관객들에게 진한 인상을 남긴 정해성 감독을 만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림의 원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우와 한별> 이전에는 사회적이거나 윤리적인 주제의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이끌어 온 동기나 커다란 구심점이 있다면.

정해성 감독: 제가 관심이 주로 있는 건 자유와 책임의 문제예요. 간단히 말하자면 윤리 의식?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어하는 스타일인데, 그래도 지켜야 할 게 있지 않나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살아가는 이상 누구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게 타인에게 지나치게 해를 입히는 방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내가 했습니다> 같은 경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를 자신이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요. 크게 보면 <나는 보았다>와,어제 막 완성한 <동행>까지 세 작품이 묶여서 ‘속죄’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다면 <주우와 한별>은 조금 다른 맥락에 있는 건가.

정해성 감독: 그런 셈이죠. 사실 공식적으로는 네 번째 작품이지만, 촬영 순서로 따지면 <내가 했습니다> 다음이에요.

<나는 보았다>랑 같은 해인 2014년에 찍었어요. 하지만 <나는 보았다>를 더 빨리 완성시켜야 하는 상황이어서, <주우와 한별>을 지금에서야 보여드리게 된 것입니다. 다만 어제 <동행>과 같이 마무리한 영화가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우리>인데, 이 영화가 바로 <주우와 한별>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속죄를 그린 시리즈와는 별개로,

사람 간의 만남이나 인연을 주제로 하는 연작의 두번째 작품이 되는 거죠.

 

<주우와 한별>에서는 영화의 흐름을 관객들에게 강요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그저 인물들을 따라가서 보여주는 연출 방식이

돋보인다. 캐릭터들에 대한 정보도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로맨스 영화와 조금 다른 어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연출 방식이 많은 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로써 의도했던 것이 있다면.

정해성 감독: 일단 저는 이야기를 먼저 쓰고 연출 방식을 고민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영화마다 스타일이 다 달라요.

만약 누군가 제 필모그래피를 다 훑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완벽하게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 영화는 처음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정보가 없는 상태로 출발했어요. 이 친구들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를 꾸미고 싶었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많은 것이 드러나지는 않지만요. 저도 아직까지도 이 친구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물론 연령대가 바뀐다든지 하는 자잘한 캐릭터 설정 상의 변화는 있었어요. 하지만 인물이 기본적으로 지닌 배경이나 특성 같은 경우는 말하지 않고도 보여주는 방식으로 언제나 일정 수준 유추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살고 있는 집이나, 다니는 동선 같은 것들을 통해서요.

 

훔친 핸드폰의 중고거래를 통해 살아가는 주우는 사회의 주류에서 소외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주인공의 배경을 설정한 특별한 원인이 있는가?

정해성 감독: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 그렇게 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주우가 일반적인 고등학생처럼 평범하게 공부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니에요. 일반적인 노선에서 벗어난 부분은 당연히 있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초중고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자기 나름대로, 다 삶의 방식을 결정을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떤 이유 때문에 주우가 그렇게 됐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게 꼭 엄청나게 가난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삶의 현장으로 떠밀렸다든가, 이렇게까지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어떻게 살아 왔는지는 관객들이 각자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출 의도(“그녀를 만나고 싶다.”)와는 달리, 막상 영화를 보게 되면 오히려 반대의 느낌이 지배적이다.

둘은 애초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비록 지하철에서 한 번 마주치긴 했지만 그걸 진짜 만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영화의 결말에는 예전과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주우의 모습이 관측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랑 영화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무엇일까. 혹은 사랑, 혹은 사랑 영화가 가져야 할 조건에는 어떤 게 있을까.

정해성 감독: 누구에게나, 끝내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인생에 있잖아요. 그 문제가 저한테는 매우 크게 느껴져요.

로맨스 장르는 무척 역사가 깊지만, 만약 멜로에도 키워드가 있다면 저한테는 가족 간의 사랑이나 친구 간의 우정이라기보다는 두 사람 간의 사랑이었어요. 여기서 핵심이 또 있다면, 한 번 만났지만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는, 혹은, 만나지 못했지만 어쩌면 만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에요. 만나서 인연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되게 마음이 아팠어요. <주우와 한별>은 이런 모든 생각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어요.

예컨대 오늘 우리도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서로 볼 수 있었던 거잖아요. 원래 우리 둘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만 존재했던 거고요. 인간관계라는 건 언제나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데, 때로는 그 사람이 살아있든, 아니면 죽었든, 알 수 없는 이유로 더 나아갈 수 있었지만 더 나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정말 마음이 아파요.

실제로는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 제게는 죽어 있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마치 살아있음에도 저와 연결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느껴지는 거죠.

그렇게 따지면 지금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카페 손님들도 죽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건 사람들한테는 항상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종류, 관계할 수 있는 인원의 수, 쓸 수 있는 시간 등 자원의 한계가 있으니까 어쩔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요.

정리해서, 저한테 멜로의 핵심은 바로 이런 만나지 못하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주우가 한별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것인지 궁금하다. 호기심, 동류의식 등 많은 결이 존재할 것 같다.

정해성 감독: 네. 그런 것들이 여러가지 섞여 있고요. 주우는 고등학생이고,

한별은 대학교를 다니고 어느새 취업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이잖아요.

성진수 영화평론가가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한별은 주우에게 그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자신의 미래 같은 존재예요. 이렇게 본다면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 미래를 알고 싶은 데서 나오는 관심 같은 것이 되는 거겠죠. 또 둘이 행하는 행위의 동질성도 주우가 한별에게 관심이 갖게 하는 주된 요인이 돼요.

조금 고상한 예를 들어 표현해볼까요. 내가 책을 좋아하는 데 저 사람도 책을 좋아해요. 심지어는 같은 작가를 좋아해요. 그럼 어떤 즉각적인 동질감이 느껴질 거예요. 물론 여기서는 절도가 공통점이 되지만요.(웃음)

 

영화에서 등장하는 한별의 기행(奇行)은 어떤 삶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정해성 감독: 글쎄요. 확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습관이 한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무조건 감독이라고 해서 특별히 알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저는 인간이 굉장히 나약하고 온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있어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떤 방식으로든 변할 수 있다고 봐요. 굳이 옹호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일정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나쁜 짓도 할 수 있고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거죠.

꼭 엄청난 궁지에 몰리지 않더라도, 어떤 한 개인이 특정한 환경에 놓이면 예상할 수 없는 많은 상황들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이런 상황에 놓이면 이렇게, 저런 상황에 놓이면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죠. 한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스트레스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거고요. 그렇지만 이건 언제까지나 개인의 성격이랑 연관이 된 거라서, 아까 주우에 대해 했던 말처럼, 감독인 저도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겨우 ‘이럴 수도 있겠다’ 추측할 수 있는 정도예요. 저는 캐릭터 구성이나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항상 이런 임의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편이에요.

 

그렇다면 한별의 죽음에도 특별한 원인이 없는 것인가.

정해성 감독: 네. 저는 멜로 장르는 그것이 흐르고 있는 라인이나 분위기가 일단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영화 전체의 톤으로 미루어 봤을 때 한별의 죽음이라는 설정이 충분히 납득이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본인의 작품에서 연기를 직접 한 경험이 있다. 연기 디렉팅에는 어떤 방식으로 관여하려고 했는가?

정해성 감독: 저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배우들의 역량과 제 영화를 많이 매칭하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에요.

사실 이번 영화에 출연하는 이주우와 장한별이라는 배우는 둘 다 전업 연기자가 아니에요. 주우는 제 영화의 미술감독이었고, 한별도 영화 분장을 도와주시는 분이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당연히 이런저런 굴곡이 있었지만, 그래도 주우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건 그의 얼굴이나 인상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이 영화의 톤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일반인이라고 볼 수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연기를 원했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는 배우 분들 중에서는 전도연 선배님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유가 저는 배우가 말하지 않고도 이미 얼굴에서 사연이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예요. 그래서 화면에 얼굴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어떤 이야기가 바로 성립이 되는 것 같은 배우들을 저는 선호하는 편이에요. 주우와 한별이라는 친구들의 마스크에도 그런 장점이 컸기 때문에, 이 배우들 본연의 장점을 살리는 식으로 디렉팅을 했던 것 같습니다.

 

미쟝센 단편 영화제와는 첫 만남이다. 출품을 결심하게 된 계기나, 영화제를 둘러싼 추억이 있다면?

정해성 감독: 저는 다른 영화의 스태프로 몇 번 왔었고요, 비록 상영하지는 못했어도 앞서 만든 작품들 모두 출품한 바 있는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단편 영화란?

정해성 감독: 저한테 단편 영화란 ‘지금 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같은 얘기를 에세이나 소설로도 쓸 수 있겠지만,

지금 저는 어찌됐든 영화라는 일을 해오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영화를 크게는 문학의 일부로 보고 있어요. 문학을 누군가의 얘기를 풀어 나가는 매체로 바라볼 수 있다면요.

이렇게 본다면 단편영화는 저라는 개인과, 주변의 동료들이 자유롭게 우리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어떤 좋은 표현 수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날 수 없는 인연이었기 때문에 더 애틋한 주우와 한별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앞으로 다가올 지 모를 인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듯 했다. 지금 어떤 가능성도 허락되지 않는 삶이, 미래에 펼쳐질 지 모를 일말의 가능성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지 않고 그저 인물을 따라가 보여주는 담담한 어조가 돋보이는 영화 <주우와 한별>이, 관객 분들이 모른 채 스쳐 지나가고 말았던 사람들과의 인연에 부디 가 닿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