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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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끝낼 수 없다, <택싱 데이> 이재휘 감독

글 : 김민비 / 사진 : 이가영

어둠을 삼킨 도로는 스산하기 짝이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택시를 잡으려는 한 남자의 등 뒤로 꼴좋다는 듯한 눈빛이 칼날처럼 꽂힌다. 절망한 남자가 무릎을 꿇어 보지만, 변하는 건 없다. 짙은 술 냄새들이 엉기어 스크린 밖으로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별안간 소리를 왁 지르며 길길이 날뛰는 남자도, 태평하게 쳐다보는 남자도 저마다의 입장이 있다. 감히 그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 보는 사람에게 모든 판단을 맡긴 채 한발 뒤로 물러나 있던 감독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의뭉스러운 관조자, 영화감독 이재휘다.

 

Q. 영화 <발악>에 이어 <택싱 데이>로 미쟝센 단편영화제를 다시 찾게 되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이번 미쟝센 단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게 된 소감을 듣고 싶다.
A. 개인적인 견해이긴 한데, 제 영화가 독립영화제나 단편영화제가 좋아하는 부류의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제 영화를 좋아해 주셔서 더욱 특별하고, 애착이 가요.

 

Q. 이번에도 역시 4만번의 구타로 만나 뵙게 되었다. 액션, 스릴러 장르의 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물론 모든 장르가 매력적이지만, ‘4만번의 구타’의 가장 큰 매력은 대리만족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화나는 일, 답답한 일이 있어도 영화처럼 풀어내기 힘들잖아요. 영화 속 주인공은 화가 나면 풀고, 하고 싶으면 해내니까 일정 부분 해소가 되죠.

 

Q. 두 편의 영화에서 눈에 띄는 공통점을 찾는다면, 단연 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단순한 이동 수단으로서만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아닌 듯한데, 소재에 남다른 애착이 있으셨던 건지 궁금하다.
A. 개인적으로 차에 관심이 많아요. 어릴 때부터 차가 나오는 영화면 그냥 좋아했던 것 같아요. 연출자의 눈으로 본 차는 굉장히 좁고, 개인적이에요. 평소에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더라도 운전할 때, 누가 끼어들면 신랄하게 욕하게 되잖아요.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가장 사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인물의 솔직한 모습을 표현하기에 좋은 것 같아요.

 

Q. 다른 공통점으로는 주인공을 극한까지 몰아간다는 데 있다. 누군가 죽었다, 혹은 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제약이 걸리고 그 안에서 인물이 발버둥 치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통된 생각이 있었던 건가?
A. 말씀하셨던 것처럼 죽음은 극한의 소재잖아요. 만약 주인공이 회사에 뭘 놓고 왔다고 택시를 훔쳐서 회사로 가겠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가 죽을 위기에 놓였다고 하면 쉽게 공감할 수 있죠. 몰입을 위한 소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Q. <택싱 데이>의 ‘taxing’은 곧바로 택시를 연상하게 하지만, 실은 ‘아주 힘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제목의 의미를 알고 나니 의도하신 바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짓게 되었나?
A. 글을 쓸 땐, 제목을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편집 이후에 고민하는 편인데, 해 놓고 보니 택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을 짓고 싶었어요. 택시를 소재로 한 영화가 너무 많다 보니까 좋은 제목들은 이미 다 쓰였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택시 드라이버>를 따라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웃음) 택시를 계속 검색해 보다가 우연히 ‘택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어요. 영화와도 상황적으로 잘 맞아떨어져서 ‘택싱 데이’로 짓게 되었습니다.

 

Q. 승차 거부와 승객 갑질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기사와 오인의 갑을 관계가 뒤집히는 지점이 흥미로웠던 이유다. 영화가 고발하고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토대가 된 건 경험이었어요. 많이들 경험해 보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사실 고발에 중점을 둔 건 아니었고,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고 싶었어요. 택시를 이야기했을 때 “저런 일도 있어?”와 같은 신선함도 좋지만, “맞아, 맞아. 택시 저래.”라는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끌어내고자 했어요. 그러다 보니 ‘강남역 승차 거부’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사회 문제를 다루게 되었던 것 같아요.

 

Q. SNS 스타와 용감한 시민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인물이 서브로 등장해 당장의 상황 해결보다는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입장이 있지만,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운다는 연출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입장 차이는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택싱 데이>는 이러한 갈등을 여러 유형으로 확장해 나간다. 낙관적인 결말은 아니었는데, 갈등에 대한 감독님의 견해가 듣고 싶다.
A. 말씀하신 갈등 구조들이 긍정적으로 해결되는 방향은 보기 드문 것 같아요. 정말 사소했던 일도 입장 차이에 의해 커지잖아요. 어머니라는 단어 때문에 해피 엔딩으로 갈까도 고민해 봤었는데, 제가 경험한 바로 이런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서로의 입장만 고집하다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은 비관적인 결말을 택하게 됐어요. 결국, 항상 이렇게 끝난다는 느낌으로요.

 

Q. 기사 역의 장유 배우와는 다시 합을 맞추게 되었다. 보편적인 기성세대의 얼굴로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오인을 더욱 절박하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하며 복합적인 연기를 보여 줬다. 캐스팅 비화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함께 나눠 주셨으면 좋겠다.

A. 신기하게도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항상 나오세요. 처음 얼굴을 뵀던 건 <추격자>라는 영화였는데, 파출소장 역으로 간결한 대사를 소화하셨어요. 그 이후에 <끝까지 간다>에서 뵙게 됐죠. 정말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대체할 수 있는 배우를 고민해 봤을 때, 딱히 떠오르는 분이 없었어요. 그래서 수소문 끝에 연락드리게 되었죠.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어르신들도 귀엽다는 표현을 들으실 때가 간혹 있잖아요. 그 대명사이신 것 같아요. 화를 내도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 화를 귀 기울여 듣게 되고,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 그런 매력이 있어요. 어떤 역할을 드려도 관객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성세대의 모습으로 다가와 주셔서 찾게 돼요.

 

Q. 인상적인 신이 많았다. 물론 모든 장면이 모여서 <택싱 데이>라는 좋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감독님께서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이 있다면? 관련된 에피소드도 듣고 싶다.
A. 원테이크다 보니까 전부 고생해서 찍긴 했는데, 그래도 경찰서 신이요. 상업영화가 아니라서 예산이 한정적이었어요. 아수라장 같은 느낌을 주고 싶은데, 보조 출연자를 모실 여력이 안 되는 거죠. 어떻게 하면 적은 인원으로 복잡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어요. 모든 인물을 따라가되 정신없이 따라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담아 주는 워킹도 필요했고요. 촬영 감독님과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오인이 넘어질 때, 카메라가 같이 쓰러지잖아요. 정말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열심히 찍었습니다.

 

Q. 홀로 남겨진 오인의 옆으로 택시 한 대가 다시 들어서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힘든 하루가 또 반복될 수 있다는 비극을 남긴 것인지, 아니라면 어떤 의미였는지 알고 싶다.
A. 단편영화의 특성상 제 영화만 보시는 게 아니라, 바로 다음 영화로 넘어가요. 영화에서 빠져나와서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에서부터 화면이 쭉 뒤로 빠지도록 뒀어요. 과할 정도로 긴 장면이었죠. 지난 이십 분을 돌아보면서 누구의 잘못인 것 같은지 스스로 결론을 내려 보시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관객분께서 질문하셨을 때, 무책임하게 답하고 싶지 않아서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오인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거예요. 오인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어딘가로 향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원래는 경찰서 유리문 너머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반사된 오인으로 포커스를 옮겨서 끝내려고 했었어요. 근데 생각할 거리가 너무 적어질 것 같더라고요. 택시를 한 대 배치해 놓고, “당신이라면 이 택시를 다시 타고 어디를 먼저 갈 것 같아, 누구를 제일 먼저 찾아갈 것 같아?”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어요.

 

Q.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래퍼 우원재의 ‘진자’가 흐른다. 가사가 영화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OST로 선정한 이유가 있었나?
A. 곡을 놓고, 글을 쓴 건 아니었어요. 실제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들었던 곡은 이병우 음악 감독님의 ‘춤’이었죠. 영화 <마더>의 엔딩 곡이요. 그런 느낌을 내고 싶어서 감독님께 팀파니나 마림바 같은 악기를 써 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우원재 씨의 곡은 촬영 감독님과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꽂히게 됐어요. 말씀하신 대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이걸 엔딩 곡으로 써 버리면 어떨까 했는데, 그걸 쓰고 나니까 앞의 음악들이 동떨어져 보이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어요.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거든요.

 

Q.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다시 미쟝센 단편영화제에 출품하게 된다면 어떤 장르의 영화로 만나 뵙게 될지 궁금하다.
A. 저는 항상 액션 영화를 만드는데, 보시는 분들은 코미디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가 눈으로 보기 좋아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밝고, 보는 이후에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영화들이거든요. 근데 만든 건 시쳇말로 멋 부리는, 인물의 감정이 과잉되어 흘러가는 영화였어요. 인풋과 아웃풋이 매우 큰 차이를 보이죠. 다음에는 보기 좋은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물론 또 쓰다 보면 원하는 결과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이전의 작품들은 마냥 유쾌하지 않았잖아요. 극장을 기분 좋게 나서면서, 친구들과 밥 먹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Q. 말씀하신 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알고 싶다.
A.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요. 정신적 시련을 받는 남녀가 서로를 치료해 주는 영화예요. 두 인물이 미친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데도 쉽게 공감할 수 있거든요. 행동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 안에도 그런 본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작품적으로 훌륭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요. 우리를 치유하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따뜻하고 현실적인 메시지도 있고요. 그러니까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예요. 제목부터 희망을 시사하는 영화라서 좋아해요.

 

Q. <택싱 데이>를 보러 와 주신 관객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면?
A.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물론 제 영화를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신 건 아니겠죠. 미쟝센 단편영화제를 즐기러 오신 분도 계실 거고, 다른 작품을 보러 왔다가 우연히 보게 된 분도 계실 거예요. 영화라는 게 누가 봐 주기 전까지는 영화라고 불리기 뭐하니까 그냥 봐 주신다는 자체로 감사한 것 같아요. 요즘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사이트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안 좋은 평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그것조차도 시간을 내서 적어 주신다는 게 감사한 거예요. 보면서 제가 항변이나 대변을 하고 싶은 상황도 있고, 정말 받아들여지는 상황도 있어요. 어떤 방향이든 저에게는 발전적이에요. 대신 봐 주시고, 또 생각해 주시는 게 감사한 것 같아요.

 

Q.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감독님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응원의 한 마디도 부탁드린다.
A. 그런 영화들이 몇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재미있는데, 다른 영화제에서는 보기 어려워요. 근데 여기서는 볼 수 있거든요. 그 자체로 감사한 것 같아요. 특색 있는 영화제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고, 그렇기 때문에 저같이 다른 곳에서 기회를 얻기 어려운 감독들도 상영작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곳에서 상을 탄 영화가 칸에서 상을 타게 된다면 정말 좋겠죠. 그래도 꾸준히 미쟝센 단편영화제만의 색깔을 고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힘이 되진 않겠지만, 항상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Q. 마지막으로 이재휘 감독에게 단편영화란?
A. <발악>은 29분의 시간 동안 오백 컷 정도가 변하는 영화였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최소한의 컷으로 찍어 보고 싶었죠. 사실 <택싱 데이> 같은 경우는 웰메이드 하게 보이려면 <발악>보다 컷이 훨씬 더 많이 나뉘어야 했던 영화인데, 상업적 부담감이 없으니까 어떤 시도든 해 볼 수 있었어요. 머릿속에 있다고 해서 모두 예술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창작물이 존재해야 작품으로서 인정을 받는 건데, 단편영화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책임을 저 혼자 질 수 있어요. 물론 같이 고생해 주는 스태프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금전적으로 혹은 상황적으로 제약을 받는 부분도 있지만, 상상에 있어서는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요.

 

절체절명의 도로를 달린다는 건 자유와는 그 느낌이 조금 다르다. 어쩌면 내달린 곳의 끝에 벼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는 도발을 해 오고, 상황은 아주 힘들어진다. 하지만 헤드라이트를 끈 채 조용히 출발한 택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을 밝히고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이기심이 형형해지면,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뜻밖의 타인을 발견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답한다. “내가, 뭘.” 처음과 같은 오인이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