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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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온 영화를 오늘 봤다, ‘한국영화 100주년-단편영화, 열정의 기원들’

글 : 차민주 / 사진 : 허은

한국 영화가 올해로 100살이 되었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영화인의 땀방울과 눈물이 스크린을 거쳐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 생일상을 마련하기 위해 제18회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특별히 준비한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6월 29일 CGV 용산 6층 7관에서 진행된 ‘한국 영화 100주년 – 단편영화, 열정의 기원들’ 특별전이다. 한국 영화의 거장인 김기영 감독의 1953년작 <나는 트럭이다>와 하길종 감독의 1969년작 <병사의 제전>이 스크린에 올랐다. 특히 <병사의 제전>은 실제 16mm 필름으로 상영되어 그 전통의 진수를 생생히 느껴볼 수 있었다. 상영이 끝난 후 허남웅 평론가, 김성수 감독, 오승우 감독이 씨네토크에 참여해 뜨거운 생일 촛불을 함께 불어주었다. 단편영화의 응축된 아우라와 특수한 잠재력을 탐구한 두 감독의 끝없는 열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허남웅 평론가 : 영화 잘 감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오승욱 감독님 김성수 감독님과 함께 <병사의 제전>, <나는 트럭이다>에 대해서 얘기 나누고, 관객들 질문도 받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두 감독님께서 먼저 질문 드리자면요. 김기영 감독님과 하길종 감독님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게 언제인지, 또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성수 감독 : 저는 그 중학교2학년 때 하길종 감독님의 <바보들의 행진>을 극장에서 봤는데요. 그때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변두리 극장에서 몰래 성인 영화를 볼 수 있던 시기였어요. 그 영화가 너무나도 큰 히트를 쳐서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70년대 무렵에는 영화가 중앙에 있는 유명 극장에서 상영되다가, 변두리에 있는 극장으로 내려오곤 했어요. 한참을 기다리다가 두번째 상영관으로 내려왔을 때 아연동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바보들의 행진>을 몰래 봤어요. 근데 영화가 너무 강렬하더라고요. 저도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 영향을 좀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 장면 중에 명동에서 도망치는 장면이 있는데, 제 영화 중 <태양은 없다>에서도 정우성씨랑 이정재씨랑 도망다니는 장면이 있거든요. 후에 <태양은 없다>를 보신 한 선배님께서 ‘너 그 바보들의 행진 좋아했구나!’ 하시더라고요. 어찌보면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가 그 하길종 감독님께서 주신 영향의 자장권 안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승욱 감독 : 저는 어렸을 때 신촌에 살았는데요. 국민학교5학년 때 신촌시장 앞에 있는 육교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거든요. 이게 뭔가, 싶었죠. 나중에 그게 <바보들의 행진>에서 ‘왜 불러’ 장면이라는 걸 알았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 ‘재재재개봉관’에서 봤어요. 어릴 때라 영화가 뭘 말하는지 잘 몰랐는데, 그래도 당시에 송창식 노래를 제가 좋아해서 재밌게 봤던 것 같아요. 굉장히 강렬했던 게 ‘동해바다로’, ‘고래사냥’ 부르고 절벽에서 자전거 떨어뜨리면서 자살한 장면이었어요. 또 여자가 헌병을 안아서 키스하게 만드는 장면도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도 쇼킹하게 남더라고요. 그건 그 시절에 상영될 수 없을 법한 장면이거든요. 그 강렬함 때문인지 <바보들의 행진>은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어요. 특히 잊을 수 없는 영화는 하길종 감독님의 <별들의 고향2>였어요. 중학생 때 그 영화를 봤는데, 첫 장면이 너무 강렬한 거예요. 노란 사막 같은 곳에서 빨간 우산이 바람에 굴러가면서 송창식의 연주곡이 쫙 깔리거든요. 그냥… 미칠 것 같았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라고 느낀 첫 순간이었어요.

 

 

허남욱 평론가 : 일종의 추억이시네요. 어릴 때 얘기인데다, 말씀하신 것처럼 재개봉관도 있고 재재개봉관도 있던 시대였고요. 그 극장들은 물론 미성년자가 들어가면 안 되지만 지금과 달리 관리가 묘하게 소홀했잖아요. 또 그게 영화적 자양분으로 남아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하길종 감독님에 대해서 얘기 나눠주셨는데요,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성수 감독 : 제가 영화계에 들어와서 김기영 감독님의 존재를 알았어요. 사실 대학을 다니며 영화를 배울 때도 한국의 유명한 감독님은 몇 분 빼고 누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를 봤더라고요. 약간 외설적인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그렇지 않아서 실망한 기억이…(웃음) 또 대학교 때 김기영 감독님의 <육식동물>이라는 영화도 봤는데요, 그때는 영화를 잘 볼 줄 몰라서 그런지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대학원생일 때 <하녀>를 봤는데, 그 작품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만큼 강렬했어요. 60년대 한국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있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김기영 감독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기 바로 전 해에 부산 영화제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저는 당시 <비트>를 만들었는데 흥행이 잘 됐었거든요. 하여튼 김기영 감독님하고 얘기를 나눠볼 기회가 있는데, 김기영 감독님 너무 재밌으시더라고요. 그 무렵 충무로는 위계질서가 강할 때였는데 이분은 아예 권위의식이 없으셨어요. 약간… 말씀 많이 하는 단편영화 감독 만나는 느낌? (웃음) 대신 남의 얘기를 거의 안 들으시더라고요. (웃음) 이분은 그냥 자기 세계에 계신 예술가구나, 싶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예술이란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해 어떤 표현을 하는데, 그 표현방식이 그 사람 하나 밖에 없을 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저희가 다음 차기작에 대해 여쭈었더니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시는데, 그 덩치가 크신 분이 천진난만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니 뭔가… 귀엽기도 하고… (웃음) 그 다음 해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허남웅 평론가 : 말씀을 듣다보니 기억나는 게 있는데, 당시 부산 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님께서 자신이 젊은 관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걸 알고 힘을 얻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빨리 차기작 만들어야지’ 라고 다짐하셨다고 해요. 그러다 사고를 당하셔서 차기작을 만들지 못하고 돌아가신 게 참 안타깝네요. 또 말씀이 많다고도 하셨는데요. 감독님의 <나는 트럭이다>라는 작품도 나레이션이 대부분인 걸 보면, 김기영 감독님의 개인적인 특징이 드러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오승우 감독님은 김기영 감독님이나 하길종 감독님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오승욱 감독 : 하길종 감독님과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어요. 충무로에 처음 들어갔을 때 김기영 감독님에 대해 물어보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 들었던 게, 콘티를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다고 하더라고요. 옛날이라 촬영하면서 볼 수 있는 모니터도 없고 배우도 자기가 어떻게 찍히는지 잘 모르고 그런 상황인데 콘티도 없다는 거예요. 물론 콘티가 있지만 안 보여주시는 거죠. 막 조르니까 보여주시긴 했는데, 되게 작은 종이를 손에 쥐고 눈 앞에 잠깐 싹! 보여주시고 마셨대요. (웃음) 또 촬영을 들어가면 쉬지를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촬영 중에는 하얀 고무신만 신고 다니신대요. 여름에 찍을 때 굉장히 고생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맨발과 고무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화학 작용 같은 게 있잖아요. (웃음) 또 밥은 잘 안 드시고 꽁치 통조림만 드시고.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하나 더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초록물고기> 조감독으로 있을 때 얘기인데요. 제가 워낙 김기영 감독님께 관심이 많아서, <초록물고기> 캐스팅을 할 때 김기영 감독님 영화에 출연하셨던 배우분이 아직도 연기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캐스팅을 했어요. 그분께 김기영 감독님에 대해 여쭤보니까, 그분께서 자기는 단역, 조연급으로 등장한 사람일 뿐이라면서 얘기를 잘 못하시더라고요. 주연급 배우나 말씀을 잘 하시지 조연급 배우에게는 김기영 감독님이 거의 하늘인 거죠. 그분이 저하고 스크립터분하고 눈 여겨보시고서는, 김기영 감독님께서 <악녀>라는 영화를 만드는데 조감독 할 생각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초록물고기>하면서 마음의 병도 얻기도 했고, 조감독하는 게 너무 싫어서 거절했던 기억이 있어요. 여기까지가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허남욱 평론가 : 조감독 제의를 거절했다고 하셨는데, 잘하신 것 같아요. (웃음) 언젠가 김기영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조감독은 심부름꾼’이라고 하셨던 적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면 감독님 문하에 감독인 분이 안 계시잖아요. ‘이런 건 알아서 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이 크신 분이라, 조감독으로 들어가셨으면 꽤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다음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볼 텐데요. 방금 상영된 두 편의 영화, 어떻게 감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트럭이다>에 대한 감상 먼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수 감독 : 사실 저는 영화관 들어올 때 이렇게 많은 분이 계실 줄 몰랐어요. 저희 세대 감독들한테 이 두 감독님은 굉장히 특별한 분이시거든요. 봉준호 감독님이 김기영 감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처럼 어떤 유사성이 있기도 하고요. 저희 세대 감독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분들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계신 관객분들이 이 두 편을 끝까지 보신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실은… (웃음)

 

오승욱 감독 : 말이 안 나오시군요. (웃음)

 

허남웅 평론가 : 그래도 <나는 트럭이다>는 <병사의 제전>보다는 이해하기가 쉽죠.

 

김성수 감독 : 김기영 감독님은 주인공 뿐만 아니라 공간, 소품, 작은 동선에도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시고 계신 것 같아요. 또 모든 걸 물신화하는 경향이 강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트럭이다>를 보면서 ‘트럭을 저런 식으로 바라보셨구나’ 싶기도 했어요. 인상적인 장면은 미군들이 쓰다 버린 트럭을 고쳐서 한국의 재건 활동에 쓰는 장면이에요. 상위 군인과 트럭이라는 사물이 같은 위치를 점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한국 전쟁이 민족끼리 일어난 전쟁에서 사상자가 제일 많은 전쟁이라고 하더라고요. 정신적인 외상까지 합치면 그 상처란 어마어마할 겁니다. 상위군인과 트럭이 겹쳐지는 느낌을 보고, ‘김기영 감독님이 이런 생각을 하셨구나’ 싶더라고요.

 

오승욱 감독 : 저도 상위군인들이 나오는 걸 주의 깊게 봤습니다. 아직도 어렸을 때 상위군인의 공포를 잊지 못하거든요. 마을에 상위군인이 오면 재앙수준으로 깽판을 쳐요. 돈이나 물건을 내놓을 때까지요. 상위군인이 왔다는 소리가 들리면 다들 문고리를 잠그고 장독대에 숨어서 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또 하나 독특했던 것은 김기영 감독님 영화에서 유리 식탁 위에서 두 사람이 정사를 나누다가 시커먼 가위로 기름기 있는 배를 찌르는 장면입니다. 김기영 감독님 영화라 하면 ‘촉감’이라는 감각이 떠올라요. 이 영화에서도 재밌게 느껴지는 게 카바이튼 물에다가 피스톤을 담갔다가 꺼내면서 오일 기름 때를 담는 장면이 있잖아요. 김기영 감독님께서 몸에 덕지덕지 붙거나, 붙은 걸 떼어내거나 하는 걸 좋아하신 분 아닌가, 싶더라고요. 심지어 <하녀>에는 끈끈이풀이 등장하기도 하죠.

 

 

 

허남웅 평론가 : 이 작품 같은 경우는 김기영 감독님께서 본래 찍던 영화에서 남은 필름으로 이틀만에 찍으셨다고 해요.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 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도 있는 한편, 기괴한 느낌도 잘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앞서 김성수 감독님께서 관객분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셨는데요. 보니까 <병사의 제전> 때는 나가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웃음) 아무래도 <병사의 제전> 같은 경우 사운드가 유실됐기 때문에 관람하기에 힘드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감독님께서는 하길종 감독의 <병사의 제전>을 어떻게 감상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오승욱 감독 :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희 세대의 영화인들은 하길종 감독님과 김기영 감독님의 자장 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희들 때에는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게 썩 좋은 일이 아니었어요. 한국영화란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됐었죠. 한국영화라 하면 에로 영화, 호스텍스 영화, 태권도 영화가 주를 이루는데 그걸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청소년은… 소위 ‘글러먹은 애’죠.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보고 자랐으니…(웃음) 그때 한 줄기 빛이 하길종 감독님이셨어요. UCLA에서 영화 공부를 제대로 했단 것 자체로 전설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학이라 하면 영화를 배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때였어요. 어찌 보면 하길종 감독님은 영화계의 지식인이셨던 거죠. 그때는 영화감독들이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거든요. 거기다 플러스해서, 동급생이었던 코폴라가 하길종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동양영화에 대한 극찬을 하기도 했고요. 전설이죠, 전설. 영화를 보시면 <이지라이더>의 무덤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잖아요. 80년대에 영화 공부하려고 영화 동아리 가면 항상 이런 영화들을 봤던 것 같아요. 자유롭게 옷 벗고 뛰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나이 드시거나 인상 험악한 아저씨 클로즈업되고, 담배를 물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요. 특히 목매는 거 꼭 나오고. (웃음) 그 60년대 특유의 분위기에 걸맞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허남웅 평론가 : 60년대라는 시대를 생각하면, 대단하죠. 복원된 영상만 봐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련되었고요. 오히려 사운드가 없기 때문에 내용을 상상하면서 해석을 더해가는 게 일종의 재미난 과제 같기도 합니다. 김성수 감독님께서는 <병사의 제전> 어떻게 보셨나요?

 

김성수 감독 : 제가 80년대 후반에 충무로에 왔을 때, 충무로 사람들에게 하길종 감독님은 전설로 남아있더라고요. 그 얘기를 잘 귀담아듣고, 하길종 감독님이 돌아가신 후에 나온 책을 청계천에서 구입해서 뽐내던 게 기억이 나네요. (웃음) 시대적으로 폐쇄적이고 궁색한 살림살이 내에서 어렵게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본토에 가서 영화를 직접 배우고 오신 유일한 분이 하길종 감독님 같아요. 예를 들어 코끼리를 아무도 안 봤다면 그 분은 코끼리를 직접 보고 오신 분이죠. 때문에 하길종 감독님께서는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서 유학으로 영화를 배우고 왔으니 한국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겠다는 사명감이 굉장히 강하셨던 것 같아요. 그 분의 그런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고, 저도 그 영향권 내에 있었고요. 아까 오승욱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실은 <병사의 제전> 내용이 많이 소비가 된 실험 영화 방식이에요. 그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너무 형식적인 것으로 흘러가니까, 형식을 파괴하기 위해 무형식의 형식을 만들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처럼 파편같은 영화가 자주 등장하곤 했어요. 또 한국의 경우 입맞춤만으로도 영화 상영이 되지 않을 때인데, <병사의 제전>에는 파격적인 신체 노출도 있고요.

 

 

 

허남웅 평론가 : <병사의 제전>의 경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즉 시공간의 이동을 편집으로 표현해낸 게 파격적으로 잘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봐도 파격적인데, 60년대에는 더 충격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질문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영화를 만드시는 분들도 많이 오시는 영화제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 지망생들이 이 단편영화를 봤을 때 어떤 부분을 취하면 좋을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오승욱 평론가 : 저희 세대가 하길종 감독님과 같이 일했던 분들하고 접촉한 마지막 세대라고 하더라고요. <초록물고기> 촬영할 때, 유영길 촬영감독님과 인연이 생겼는데 그분께서 하길종 감독님과 함께 촬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유영길 촬영감독님께서 옛날 충무로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자신이 하길종 감독님으로부터 굉장한 걸 배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도끼인가 칼로 사람을 내려 찍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유영길 촬영감독님께서는 그 모습 전체를 담으려고 하셨다고 해요. 근데 하길종 감독님께서 말씀하시길, ‘프레임에 사람이 안 들어와도 된다, 팔만 나와도 된다’라고 하셨대요. 실제 결과물을 보니 팔만을 촬영한 것이 더 파워풀했다고 하더라고요. 분노라는 감정도 더 잘 표현된 것 같고. 제가 생각하기에… 하길종 감독님은 한국이란 나라에서 화병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한국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죠.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끔찍해요.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심의 자료를 받아본 적이 있었어요. 영화마다 장면과 대사가 삭제된 기록이 쫙 있더라고요. 놀라웠던 건 김기영 감독님의 <반금련>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작품은 한 7~8년 동안 빛을 못 봤어요. 원래 210분짜리 영화인 걸 8~90분으로 줄여서 겨우 상영이 되었고요. 근데 <반금련> 심의를 맡은 사람이 경장이라고 해서 또 한 번 놀랐어요. 경장은 그렇게 높은 직책도 아니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박약한 7~8년 간의 삭제 기록을 보는데, 이걸로 책을 하나 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어요. 그분들 덕에 지금 우리가 표현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거고요. 그때는 표현의 자유 자체가 없던 시기였잖아요. 그 시기에 <병사의 제전>이 상영이 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허남웅 평론가 : 하길종 감독님도 의욕이 많으셨을 텐데 빛을 못 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병사의 제전>을 보면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김성수 감독님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성수 감독 : 여러분께 ‘옛날에 이랬어’라고 말하는 건 공허한 얘기 같습니다. 두 영화를 어떻게 감상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몫이기는 하지만은,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김기영 감독님 영화 중에서 <하녀>를 안 보셨다면 꼭 보세요.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80년대에 단편영화를 만들 때,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와 유현목 감독님의 <오발탄>이라는 영화를 보고 환호를 했거든요. 이렇게 근사한 영화를 만드는 분이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분 영화 덕택에 우리도 잘해야 된다는 희망이 생겼던 것 같아요. 또 하길종 감독님 <바보들의 행진> 같은 영화는 사실 되게 재밌어요. 그 문화나 시대를 모르면 덜 재밌을 수도 있지만, 풍자가 돋보여요. 그때는 시내에서 여성분들이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 되는 시기였어요. 남성분들은 귀밑머리가 카라에 닿으면 안 됐고요. 그렇게 뭔가를 표현하지 못하는 시대에 하길종 감독임이 해외에서 영화를 배워와서 파격적인 영화를 만드셨고,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폭제가 되었죠. 김기영 감독님처럼 ‘나는 내 방식 대로 영화를 만들겠다’라고 하는 듯한 제작 방식도 그래요. 감히 말하자면 독립 영화와 같은 제작 형태를 취하고 계신 것 같아요. 독립 영화와 같은 자유로운 정신과 저항의 정신이 있는 거죠. 틀에 박힌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건 죄악이라고 말하는 프론티어 같은 분들이니까,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허남웅 평론가 : 참고로 유튜브에 들어가시면 <나는 트럭이다>도 볼 수 있습니다. (웃음) 김성수 감독님 초기 인터뷰 찾아보면 매번 <우발탄>을 언급하시더라고요. 오늘도 혹시 말씀하시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정말 해주셨네요. (웃음) 그럼 이번에는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손을 들어주세요.

 

 

 

관객 : 쉽게 보기 힘든 단편영화를 관람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트럭이다>를 보고 김기영 감독님이 이런 영화도 만드실 수 있다니,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에 우리 때는 영화 보기 전에 ‘대한 늬우스’라는 게 나왔는데 그 영상이랑 어울리는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요. (웃음)

 

김성수 감독 :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웃음)

 

관객 : 한편 <병사의 제전>을 볼 때는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는데요. 하길종 감독님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싶었어요. 책은 독자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잖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도 보지 않을 만큼의 파격적인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요? 연출하시는 분만이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오승욱 감독 : 69년이라는 시대가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앤디 워홀 같은 경우 자는 사람만 4~5 시간 동안 계속 찍기도 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 12시간씩 찍기도 하고. 또 그런 걸 12시간 동안 관객이 보고. 그런 것들이 성행하던 시대였던 것 같아요. <이지라이더> 같은 경우에도 데니스 호퍼가 피터 폰다하고 자기 친구들 데리고 와서 묘지에서 1~2 시간 짜리 영화를 찍었는데 그것도 이런 식이었거든요. 물론 그걸 본 프론티어가 노발대발을 해서 그 장면을 다 없애버리라고 했죠.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게 바로 <이지라이더>의 그 묘지 장면이에요. 발가벗고 묘지 위에서 뒹구는 장면이요. 기존의 영화를 전부 부정해버리는 6~70년대 젊은이가 가지고 있었던 기운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게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의 ‘학생 영화’이기도 했고요. 이전의 감독들은 하지 않은 방식으로, 즉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열기로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분단국인데다 군사정권인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청년 하나가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려고 했다는 것이죠. 당시 학생 작품을 보면 다 <병사의 제전>처럼 전위영화의 형식과 비슷해요. 일본에서는 테라야마 슈지라는 감독이 비슷하게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인물을 촬영하기도 했고요. 시도 소설도 음악도 할 수 없는 영화적 한 방을 69년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69년도에 미국에 갔었다면 아마 이런 형태로 영화를 찍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김성수 감독님 : 하길종 감독님을 뵌 적이 없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찍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질문이 ‘하길종 감독님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만들었냐’라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대량 복제를 해서 여러 사람이 보는 방식인데 ’왜 아무도 보지 않는 걸 만들었냐’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사실은 저도 동료들 영화를 보면서, ‘왜 저런 영화를 만들었지?’ 싶을 때가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 제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얼마 전에 친구랑 술을 먹으며 제 최근작인 <아수라>라는 영화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영화를 되게 만들고 싶어서 만든 거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저에게 ‘너 왜 그딴 거기 같은 영화를 만들었냐’라고 타박하더라고요. (웃음) 술이 들어가니까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나오는 거죠. (웃음) 하길종 감독님과 김기영 감독님도 실은 저보다 더 심한 딜레마에 빠지셨던 분이죠. 항상 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잘 전달하는 방식을 탐구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게 바로 모든 영화에 대한 좋은 ‘기술’이거든요. 그렇지만 대량복제로 다수를 위한 예술을 하다보니까 ‘틀에 박힌 방식’으로 전달되는 게 불가피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뭔가 ‘틀에 박히지 않고도 다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만의 표현 방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를 고민하게 돼요. 특히 젊었을 때는 패기가 있기 때문에 ‘나만의 언어’로 기성 영화의 가치를 전복시키겠다는 용감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하길종 감독님이 한국 사람으로 유학을 갔다는 건 사실 적진에 들어간 거나 다름이 없잖아요. 당시에 미국의 인종 차별이 굉장히 심할 때였거든요. 때문에 하길종 김독님께서는 ‘너희가 취하고 있는 표현 방식의 핵심을 동양인인 내가 한 번 건드려 보겠다’와 같은 용감한 생각으로 실험적인 영화의 방식을 채택하신 것 같아요. 표현 방식이라는 건 시대의 실험이잖아요. 사실 오늘 우리가 본 영화는 너무 늦게 온 영화예요. 당시에는 저게 굉장히 용맹한 표현 방식이었던 거죠. 사운드가 유실된 상황인데 만약 누군가가 좋은 소리를 잘 입혀서 상영하면 보다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남웅 평론가 : 네, 두 감독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자리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찾아 주신 관객분들께 하고 싶으신 마지막 한 마디가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승욱 감독님 : 방금 말씀하신 대로, 너무 늦게 온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전설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것이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공간 안에서 하길종 감독님과 김기영 감독님께서 어려운 시대에 만든 영화를 함께 보는 것, 이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 미쟝센 단편영화제 고맙습니다. 소중한 경험과 추억이 될 것 같아요.

 

김성수 감독님 : 지금 극장에서 돈을 내고 보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너무 늦게 온 영화죠. 그렇지만 우리가 박물관에 가서 옛날 빗살무늬 토기를 볼 때 현재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께서는 오늘 박물관에 오셔서 한국영화의 뿌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두 감독의 족적을 관람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이 두 분들로부터 현대의 한국 영화가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거든요. 봉준호 감독이 김기영 감독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이죠. 박물관에서 귀한 걸 보시고 간다는 생각을 하시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감독님의 말씀처럼, 너무 늦게 온 영화를 오늘 우리가 보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 산업이 나날이 발전하는 한국 사회다. 이처럼 현재 한국 영화가 불타오를 수 있는 이유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수많은 영화인의 노고 덕택일 것이다. 어제 타야 했던 버스를 오늘 우리가 타버렸다. 하길종 감독과 김기영 감독이 꽃피운 한국 영화의 뜨거운 시발점이 버스의 엔진이 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영화를 찾는 모두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