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싶어”
살고 싶다는 욕망. 그 언저리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불안과 희망이라는 덩어리들. 인간은 끝없이 불안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희망을 만들어낸다.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지 않는 한 ‘희망’이라는 유혹의 속삭임은 우리를 또 다시 살게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는 한 ‘불안’은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로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희망과 불안의 끝없는 반복 속에 살아가는 우리네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이스>의 이성욱 감독님을 만나보았다.
Q1. 영화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 부탁드린다.
A. 이 영화가 제작된 게 작년 2019년인데 그 당시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폐막작 지원작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그 때 제작사항에서 퀴어 인권과 에이즈 이슈가 담긴 주제와 소재 지원작들이거든요. 그래서 소재나 주제면에서 정해져서 들어간 게 있었던 영화입니다. 크게는 그런 범위였고 그 중에 저는 자료조사를 좀 하다가 에이즈에 무방비로 가장 노출되는 사람들 중에 마약을 통해서 관계를 맺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조사를 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던 것 같아요.
Q2. 오랜만의 연출을 맡으셨는데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움이 컸던 부분은?
A. 작년 10월에 촬영을 했는데 포항 바다쪽에서 찍었거든요. 근데 10월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너무 덥고 야외촬영도 많고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Q3.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음지에서 약물에 의존하며 죽어가는 성소수자들을 통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통해 말씀하시고 싶던 주제가 있으신가요?
A. 제가 영화를 만들 때 키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두 남자가 망연자실하게 기도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저의 키 이미지였어요. 그런 불안한 사람들이 중독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할 수 있을까 했을 때 저는 기도가 생각났거든요. 아마 그 장면이 보고 싶어서 영화를 제작한 것 같기도 해요. 아무래도 중독자라는 소재이기도 하고 보통은 중독자나 마약이라는 소재가 다른 장르 영화나 이런 거 안에서는 되게 소재적으로 다뤄지잖아요. 근데 이걸 좀 내부적인 시선에서 인물로 다가가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제작했습니다. 피상적인 접근이 아니라 내면으로 다가가서 깊은 이해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Q4. 영화 전체가 흑백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기괴한 배경 음악이라던가 마약 후에 드라이브 씬에서 화면이 돌아가는 연출 등 그로테스크한 연출미가 돋보였는데 그렇게 연출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A. 제가 워낙 흑백 이지미를 좋아하기도 하구요. 일단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에서 미술에 많은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미술적인 부분들을 생각했을 때 이 영화가 흑백의 이미지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마약을 하는 장면도 나오고 마약을 하는 인물들이 나오니까 정서적으로 조금 다른 게 표현됐으면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음악들이 ‘콤파스’라는 전자음악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그분들의 음악이랑 정서적으로 굉장히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좋게 봐주셨다고 느낀 게 감각적으로 묘한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Q5. 승진은 마약이라는 일시적 행복감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항상 자신을 숨기려고 하고, 태윤은 약물이라는 일시적 쾌감에 취해 죽음도 두렵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승진은 삶에 미련이 있는 것이고 태윤은 삶에 미련이 없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항상 불안해하는 승진과 두려움이 없는 태윤, 두 인물의 성격을 대비되게 설정하신 이유는?
A. 승진은 약물에 대해서 오래된 중독자이구요. 태윤은 이제 약물에 빠져들어가는 설정이었는데 짧은 극 안에서도 처음과 끝의 성격들이 다르게 표현됐으면 했거든요. 그래서 둘이 끝에 관계에 대한 감정 구도도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렇게 설정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뭔가 승진이 좀 더 차가운 느낌이면 나중에는 승진이 조금 더 태윤을 감싸주는 느낌으로. 그런 변화가 있었으면 했던 것 같구요.
Q6. 가장 마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해하던 태윤이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말 이제 마약을 끊고 건강하게 살거라는 의지를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오래 살자고 연거푸 말하는 승진의 기분에 맞춰준 것인지 궁금합니다.
A. 그거는 태윤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태윤이 영화에서 잠깐 설정처럼 드러나는데 에이즈 환자라는 설정이 있거든요. 중간에 에이즈 관리 약을 먹고 있는 그런 설정도 잠깐 들어가 있구요. 그래서 양가적인 감정? 이 쾌락에 완전하게 빠져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이 쾌락 때문에 자신이 망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더 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 않을까.
Q7. 연기 디렉팅을 하실 때 가장 어려우셨던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아이스>를 처음에 계획했을 때 아무래도 남자 남자끼리의 관계신이 있으니까 보통 배우분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꺼려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그것에 대한 합의나 설득이나 진행 과정에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웠구요. 많은 얘기들과 조율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촬영을 했던 것 같아요. 관계신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할 때도 서로 시나리오에 대해서 배우들이랑 이해가 먼저 바탕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구요. 그래서 많은 대화를 하고 들어갔던 작업인 것 같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관계신도 좀 더 활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이제 조율을 하면서 소프트하게 바뀌었던 것 같아요.
Q8. 휴게소 남자와 호텔 직원이 같은 배우님이 연기를 하셨는데 특별히 같은 배우로 연출하신 이유는?
A. 그건 일부러 의도된 거구요. 이제 승진이 약물 중독자이고 약물에 중독되면 착각이니 환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항상 경찰한테 쫓긴다는 망상이 있고 그래서 두 남자가 착각일 수도 있다는 설정으로 같은 배우를 두었습니다. 그런 설정을 통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느끼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Q9. 승진과 태윤이 마약 후에 관계를 맺는 장면을 되게 심미적으로 접근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하고자 하셨던 건지 궁금하다.
A.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굉장히 동적인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근데 저는 연출을 선호하는 스타일이 좀 정적이고 고요한 걸 잘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구요. 그런 걸 추구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좀더 아름답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 장면도 줌인하고 줌아웃하는 연출을 하면 음악이랑 더 어울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구요.
Q10. 약물을 하는 성소수자의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청춘들의 어두운 삶의 부분(행복을 찾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있는 방법도 모르고 그걸 찾을 심적 여유도 없는)이 그들에게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것도 감독님의 연출 의도에 있으셨던 건지?
A. 일단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내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굉장히 불안하지만 어쨌든 계속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리고 승진과 태윤 둘의 관계도 굉장히 불안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희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그런 것들 것 서로 레이어가 돼서 아마 말씀하신 것처럼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Q11. 퀴어영화가 점점 소수의 마니아 계층이 즐기던 장르에서 예전보다는 더 대중화된 장르로 인식이 넓혀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퀴어영화를 제작하신 감독님의 입장에서 앞으로의 퀴어 영화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A. 퀴어영화가 이제 소수적인 장르라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제가 퀴어 영화에 바라는 점이라면 퀴어 영화 안에서 뭔가 다양한 영화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존의 퀴어 인권에 대해서 많은 영화들이 있는데 꼭 그런 영화들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이 더 있으면 좋지 않을까. 좀 더 다양하게, 퀴어의 인권이나 그런 것들을 다루는 부분이 없더라도 접근할 수 있는 내용이나 소재가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Q12. 나에게 단편영화란?
A. 저한테는 영화라는 매체가 아직 능숙하지 않거든요. 영화 외에도 음악이나 무대, 공연, 영상 작업도 많이 해서요. 그래서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가 호흡을 길게, 에너지를 많이 써야된다는 느낌이라는 점인데 특히 장편은 더 그렇겠죠. 근데 단편은 그것보다는 에너지를 더 압축해서 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고 편한 것 같다. 지금은 부산 영도섬의 봉래산에 내려오는 설화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 장르의 장편 영화를 계획 중인데요. 작년에 <아이스>를 찍으면서도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뭔가 더 에너지를 길게 쓸 수 있게 장편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퀴어라는 소재 속에서 인간을 들여다보고자 한 영화 <아이스>. 극도의 불안으로 온마음이 얼어붙은 그들에게도 삶의 희망은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살고 싶어하는 주인공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이었다. 얼음처럼 얼어붙은 그들의 마음도 언젠가 따뜻한 희망의 온기로 녹아지는 날이 오기를.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해 역설적으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영화 <아이스>. 어쩐지 삶이 무기력하고 불안하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