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커튼 앞에서 능청스레 연기를 하던 여자는 자신에게 끝내주는 거짓말을 선물해 달라 조른다. 파격적인 모습으로 스텐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게 된 화령의 모습은 마치 진실된 사랑을 관객으로부터 갈구하는 것만 같다. 그 슬픔은 어디서부터 비롯 된 것일까.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의 뮤즈 심인이 배우를 만나보았다.
Q.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 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감독님의 이전 작품인 <아들딸들>에서 작게 배역을 맡은 적 있다. 영화를 처음 하게 된 작품인데, 아마 그 인연을 바탕으로 감독님이 내 캐릭터를 좀 더 써보고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감독님을 만나기 전까지 영화에 대해 한번도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배우를 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연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감독님과는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옆 집에 어떤 시끄러운 사람이 이사를 왔었다. 안면을 튼 뒤 술자리도 가지며 친해지다 보니 영화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누나는 영화를 찍어야 돼” 라고 하더라. 처음엔 그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반 개월 뒤에 정말 시나리오를 갖고 왔다. 그래서 <아들딸들>을 찍게 되었고 1년 정도 지나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 의 주연까지 맡게 되었다.
Q. 그럼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를 계기로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인가?
시작하게 되었다는 말은 너무 거창한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조금씩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Q. 이전의 경험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카메라 앞까지 서게 되었는지?
<아들딸들> 같은 경우 영화를 찍기 하루 이틀 전에 리딩을 했다. 아마 그때 감독님이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그걸 알아봐 준 덕에 연이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Q. <아들딸들> 이후 바로 단독 주연을 맡게 된 것인데, 그에 대한 소감은?
내가 감독님한테 영화를 하고 싶다고 떼를 많이 썼다. 충분히 거절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 기회를 주시더라.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인데 내가 막연하게 잘할 수 있을 거라 좀 자만했던 것 같다. 이후에 내가 하는 연기들을 보며 많이 부끄럽기도 했고. 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상영 기회가 생겼다. 벅찬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더 잘해볼 걸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Q.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화령’은 어떤 인물로 보였나?
누구나 그런 기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화령처럼 결여되는 기간도 있을 것이고, 말도 안되는 조건 속 사람을 믿고 싶어 질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랑이 주는 자기 기만, 그런 것들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화령은 나이기도 하지만 우리이기도 하고, 사람들 자체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Q. 화령은 스텐드업 코미디언이다. 개인적으로 특정 영화를 연상 시킬 정도로 빠져들었는데 이를 연기할 때 가장 신경 쓴 지점이 있다면?
감독님이 원하셨던 것과 내가 원했던 게 비슷했던 것 같다. 코미디를 하는 화령은 시간이 좀 지난 시점인데 이 때 화령은 자신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 부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이 장면은 촬영 하는데 실제 시간이 많이 들기도 했고 연습도 정말 많이 했었다. 실제 스텐드업 코미디를 하시는 분들의 영상을 찾아보며 분석하고 휴대폰으로 내 모습을 녹화 해 계속 모니터링 하며 동선에 대한 계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정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방법은 없다. 나는 그대로 다 이입을 했던 것 같다. 컨트롤 하지 않고 그대로 다 이입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진이 다 빠지더라. 해당 장면은 마지막 촬영이기도 했고. 그 장면을 찍은 뒤 한동안 감정에서 나오질 못해 몇 일을 우울해 하고 힘들어 하기도 했다. 한풀이 같은 느낌으로 연기를 해서 그런지 정말로 그 씬은 진이 다 빠졌던 것 같다.
Q. 영화의 결말에서 화령은 재호와의 대화로 털어내는 것만 같았다. 어떠한 감정으로 연기를 했는가?
극 중 화령은 상곤과 있었던 사건들이 전부 자기 기만이었으며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그 모든 것들을 희화화 하기도 하고. 결국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을 마지막에 표현하고 싶었다. 재호와 대화하는 장면 속 화령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을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Q. 연기를 하며 깊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화령을 나에 대입 시켰던 것 같다. 내 상황 같은 것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영화 자체는 초현실적인 부분들이 많다. 초반부에 대뜸 화령의 공간에 누군가 침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장면들 또한 실제 내가 불안할 때 꾸는 악몽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여를 했다. 문조와 상곤 둘과 대면하며 밥을 먹는 장면도 굉장히 묘했다. 실제로 배우들끼리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고. 영화가 전부 롱테이크로 갔기 때문에 긴장감이 더 유지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감정적인 긴장감을 계속 끌고 가고 싶었고 보여지는 조명들도 나중에 입혀진 것이 아니라 실제 원색의 조명 아래에서 연기를 했기 때문에 긴장감 유지가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한 감정들을 연기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곤란한 상황이 이어지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감당은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감정들. 불안감 속에 붕괴되는 화령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Q. 영화는 절대악몽 섹션에서 공개가 되었다. 참여할 때부터 공포와 판타지 그 사이의 분위기를 갖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는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치정 멜로 정도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아무래도 조명이나 파격적 비주얼 같은 것들이 합쳐져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확실히 악몽의 느낌도 있는 것 같다.
Q. 심화령은 매우 강렬한 캐릭터이다. 앞으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는가?
하고 싶은 캐릭터는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캐릭터를 지정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한 것 같아서 아직 캐릭터 자체를 정할 수는 없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계속 이런 식의 자기 기만을 다룬 이야기들이나 결핍, 결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좀 명쾌 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
Q.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 속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이 있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인 것 같다. 극 중에서 가장 화령의 진심이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 공간이 내가 자주 가는 술집이다. 주로 극 중 화령처럼 혼자 술을 마시기 위해 찾곤 하는데 그곳 분위기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장면을 찍을 때 상대 배우님이 워낙 연기 경력이 화려하신 분이라 엄청 긴장을 했었다. 그래서 리딩 전 서둘러 글라스에 소주를 반 정도 채워 마셨던 기억이 난다.
Q. 화령에게 말을 건낼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생각나는 말들이 정말 많은데 화령이는 지금의 내가 해주는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말을 하자면 너무 애쓸 필요 없다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
Q. 기회가 온다면 연기를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 있는지?
기회가 생긴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좋은 배역,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계속 해보고 싶다.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 있으니 말이다.
Q. 앞으로의 포부가 있다면?
최근에는 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보려 노력 하는 것 같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안정을 느끼지만 아무래도 자아가 결여 된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는 것도 같고. 무언가를 계속 의식하려 내 스스로 노력을 한다.
Q. 단편 영화란?
나에게는 정말 큰 기회였던 것 같다. 기회가 가장 맞는 말인 것 같다. 도전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도 있고. 그래서 연기를 해본 적 없는 나 역시 도전할 수 있었고. 내 일이라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정말 큰 기회였다. 물론 할 때는 잘 알지 못했다. 다른 배우 분들과 계속 호흡을 맞추면서도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나 이런 것들에 만 신경을 썼다. 하지만 리딩을 할 때 정말 내 가슴에서 나온 것 같은 대사들을 마주하거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면 진짜 살아있다고 느꼈다. 하나의 큰 움직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 이후가 결코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덧붙이며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던 그녀의 말 속에는 열정을 넘어선 어떠한 꿈이 느껴졌다. 악몽에서 빠져나올 앞으로의 화령을 생각하며 그녀의 행보를 정말 가슴 깊이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