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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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밤 당신들이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다

글 : 김민비 / 사진 : 허은

긴 여름 해가 지고 나면 괴로운 손님이 찾아든다. 바로 불면이다. 쇠뿔도 녹인다는 땡볕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뜨거운 여름밤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들은 이 밤의 허리를 베어내겠다는 의지 하나로 모여야만 했다.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잠들 수 없는 밤을 서늘함으로 꽉 채워 줄 장르, ‘절대악몽’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6월 28일 밤을 뜬눈으로 보낸 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지만, 다음 악몽을 꾸게 될 누군가를 위해 심야상영 현장을 엿볼 기회를 준비했다.

심야상영은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되었다. 상영관은 귀신의 집을 방불케 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들뜬 얼굴로 생애 가장 무서운 꿈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불은 모두 꺼지고, 본격적으로 악몽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먼저 가족의 해체를 재난에 빗댄 윤다영 감독의 <링링>이 낯선 새벽의 문을 두드렸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한지수 감독의 <기로>, 화해의 의미와 가능성에 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진 나영길 감독의 <양>, 집착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물에 투영한 강다연 감독의 <신에게 보낸 편지>가 잇달아 오감을 자극했다.

첫 번째 섹션이 막을 내리고, 터져 나올 뻔한 탄성을 삼키느라 잔뜩 불러 있던 관객들의 헛배를 든든히 채운 간식 타임이 있었다. 허기를 달랜 관객들은 쭈뼛쭈뼛 서 있던 머리를 정리하며 저마다의 흥분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영화를 전공하고 있다는 학생들은 한데 모여 궁금증을 해결하는 시간을 가졌다. <양>을 보고 영화 <호산나>를 떠올린 한 관객은 같은 감독의 작품임을 알고, 자신의 통찰력에 만족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르적 특색을 잘 살린 영화부터 단편영화의 묘미를 확실히 보여 준 영화까지 매력적인 작품들을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장내 분위기를 달구었다. 알맞은 감상과 비평을 주고받는 관객들의 모습은 미쟝센 단편영화제를 한껏 빛냈다.

다음 섹션에는 이번 심야상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 박강 감독의 <매몽>이 자리해 악몽과 현실의 경계를 한층 모호하게 했다. 예비 신부가 시댁의 애완 거미를 맡아 기르게 된다는 구소정 감독의 <거미>는 억압적 상황을 통해 영화적 욕망을 잘 발현해냈다는 찬사를 듣기에 충분했다. 비명을 시작으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공포를 시각화하는 데 성공한 계영호 감독의 <우로보로스>가 끝나고, V-CREW가 준비한 깜짝 이벤트가 펼쳐졌다. 졸음 퇴치 체조로 밤을 말끔히 잊은 관객들은 퀴즈 이벤트에도 앞다퉈 참여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적막을 깨운 유쾌한 시간이었다.

주인공 연과 대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연대와 사랑을 이야기한 정인혁 감독의 <냉장고 속의 아빠>는 남성 중심의 영웅 서사를 뒤집는 과감함을 보여 줬고, 장준엽 감독의 <프라사드>는 희생양을 통해 불안을 회피하려는 마녀사냥의 폐단을 꼬집었다. 소수자가 수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고히 한 변성빈 감독의 <손과 날개>는 홀로 아파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날개가 되어 줄 손을 내밀었다. 어느 날 어깨에 괴생명체가 자라났다는 설정으로 부조리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 준 정재용 감독의 <공허충>까지 섹션 3에서는 공포, 판타지라는 장르가 주는 자극보다 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돋은 소름을 잠재우며 상영관을 빠져나왔을 때, 정작 우리의 잠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오늘의 해는 우리를 깨우지 못했으나, 우리의 꿈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길었다. 꿈꾸지 않아도 꿈을 꾼 것처럼 부푼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얼굴들을 보며 우리가 오늘 밤 잠시 사라졌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는 일상을 훌쩍 떠나 있고 싶다면 언제든 ‘절대악몽’을 꾸러 와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