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능숙함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세상을 모두 알아 버린 듯한 얼굴은 어딘가 슬프고, 쓸쓸하다. <풀 하우스>의 요한이 그랬다. 배우는 감독의 자화상이라고 했으니 범람하는 생각에서 깊이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감독은 잘 모르겠다는 말이 먼저였다. 이 자조적인 태도가 침전해 있던 추측들을 마구 휘저었다. 처음 떠오른 것은 겸손이었고, 그 다음은 솔직함이었다. 여유로운 웃음 뒤에 숨겨진 속내를 듣고 싶었다. 영화감독 강동인이다.
Q. 영화 <풀 하우스>는 한예종 영상원 예술사 워크숍 작품이다. 학기 중의 노고를 보상받는 느낌이라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이번 미쟝센 단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게 된 소감을 듣고 싶다.
A. 공식적으로 연출한 첫 단편 영화라 부족한 점이 여실히 드러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제게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1순위였기 때문에 출품했어요. 그래서 본선 진출 소식을 들었을 땐, 많이 얼떨떨했죠. 조금 지나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요.
Q. 영화를 시작했던 때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영화학도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따로 있었는지 궁금하다.
A. 어릴 때부터 영화광은 아니었어요. 극장에 걸린 영화를 챙겨 보는 정도였거든요. 비하인드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혀 다른 전공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두 달 정도 신분 없는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뭘 하면 좋을까 하다가 조금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냥 어떤 에너지에 이끌렸어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기간이었던 것 같고, 홀린 듯이 영화 연출을 하고 싶었어요. 운좋게 준비가 잘되어서 지금의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풀 하우스>는 희망차게 도약하는 영화는 아니다. 공무원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극한에 다다른 인물이 회생을 꿈꾸는 이야기다. 연출 의도 역시 ‘희망의 기준이 다른 서글픈 현실’이라고 들은 바 있다. 감독님께서 바라보는 현실은 어떤가?
A. 현실을 거창하게 바라보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제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영했던 것 같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현실이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어요. 빈곤한 집단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들과 반대에 있는 집단은 희망을 바라보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부족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절박하고, 모든 걸 내걸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런 현실을 봤었던 것 같아요.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Q. 인생은 도박이라는 말이 있다. 극 중의 포커 게임 역시 삶을 은유하는 소재로 쓰이며, 일상과 격리된 공간을 주 무대로 차별화를 꾀하기도 한다. 이 소재를 선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A. 당시 비트코인이 성행하던 시기였어요. 우연히 비트코인에 매진하고 있는 주요 고객층이 20·30세대, 그중에서도 중산층으로 집계되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어요. 현실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일수록 모 아니면 도와 같은 확률 게임에 더 쉽게 빠져들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걸 어떤 식으로 표현하면 좋을까 하다가 ‘확률’이 두 부류를 나누는 데 좋은 키워드가 될 것 같았던 거죠. 포커가 이러한 도박성과 사행성을 상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소재라 선택하게 된 거예요.
Q. 이 영화의 동력은 요한과 길우, 두 인물의 경제력 차이에 있다. 벌이가 적은 요한에게 도박장에서 얻은 뜻밖의 행운은 마지막 희망이 된 반면, 길우는 0에 가까운 확률로 찾아온 행운을 제 발로 걷어차면서도 쉽게 다음을 기약하는 희망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국, 희망을 조금 더 쉽게 보장해 주는 건 재력일 수도 있겠다는 슬픈 인상이 남았다. 각각의 인물에게 희망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 같은데, 두 인물이 바라는 희망의 기준은 어떻게 달랐나?
A. 연출 의도에 적었던 것처럼 희망에 대한 기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들어간 영화예요. 요한 같은 경우는 쓰리 카드라는 다소 낮은 카드밖에 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올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 반면, 길우는 풀하우스를 쥐어도 쉽게 저버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요. 길우는 내일이 보장되는 사람이고, 요한은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희망의 기준이 애초부터 다른 두 사람을 대비적으로 보여 줬다고 생각해요. 제 답변은 질문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웃음)
Q. 조재영 배우는 남자 친구, 대리 기사, 공시생, 노름꾼까지 일상을 일사불란하게 누비는 요한이라는 인물로 다양한 시도가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 줬다. 캐스팅 비화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함께 나눠 주셨으면 좋겠다.
A. 캐스팅 과정 중에 여러 작품을 찾아보다가 정승민 감독님의 단편영화 <여름 기류>를 보게 되었어요. 저는 1분 30초 되자마자 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화를 받고 가다가 목발을 집어 던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서 확신하게 된 거죠. 바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작품에서는 덥수룩한 머리라 제가 생각했던 요한의 이미지와 비슷했는데, 리딩 자리에 반삭으로 나타나셨어요. 기대했던 모습과 달라서 다른 방향을 찾아보려고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잔상이 남더라고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그 머리 스타일이 더 좋은 한 수가 되어 줬다고 생각합니다.
Q. 사실 길우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사는 건강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격려보다는 동정에 가까운 태도로 요한을 대하기 때문인데, 특히 길우의 서늘한 웃음은 요한뿐만 아니라 보는 내게 비수가 되기도 했다. 길우는 어떤 인물인지, 이를 표현하기 위해 따로 넣은 디렉션이 있는지 궁금하다.
A. 길우는 캐릭터 라인을 잡는 데 가장 애를 먹었던 인물이에요. 일차적인 문제는 제가 그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거였어요. 재력가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잘 몰랐지만, 여유가 바탕이 되어 있는 인물이었으면 했고, 요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의 사람으로 그리고 싶다는 방향이 있었어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요한을 만났을 때, 길우의 태도는 동정까지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냥 ‘이 사람 뭘까, 어떤 삶을 살까.’ 정도의 여유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길우는 사람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아요. 오히려 예의를 갖추죠. 그래서 더 잔인했던 거고요. 순수한 의도였건 아니건 간에 자기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요한을 대했기 때문에 길우가 무심결에 던지는 말들이 비수가 된 거죠. 일차원적인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게 사실 어렵고, 저 역시도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별도의 디렉션을 드리지는 않았어요. 길우 역의 전운종 배우님과는 리딩 과정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장에서는 이 정도의 캐릭터라는 것만 공유했던 것 같아요.
Q. 엔딩에서 오랜 여운을 남긴 건 뜻밖에도 <풀 하우스>라는 제목이었다. 감독님께서 제목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다.
A. 전체적인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예요. 피할 수 없는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소재로 포커의 풀하우스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더 보태자면 영제가 ‘Poor House’예요. 과욕이었다고 후회하고 있지만, 말장난 같은 거였죠. (웃음) 집에서 시작되고, 집으로 끝나는 영화라 요한의 poor house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만 같은 full house를 중의적으로 표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Q. 4만번의 구타 섹션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이 영화가 장르적 쾌감에만 치우친 영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성과 사회적 함의를 함께 품고 있다. 감독님께서 <풀 하우스>의 장르를 재정의해 본다면?
A.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모르겠어요. 저는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지 않고, 무슨 장르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올 만한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정의를 해야 할지 저도 잘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Q. 평소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무엇인지,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면 함께 알고 싶다.
A. 한국 영화 중에서는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를 가장 좋아해요. 오승욱 감독님의 <무뢰한>과 김성수 감독님의 <아수라>도요. 해외 영화로는 장 마크 발레 감독님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과 <와일드>요. 저는 이 영화들의 장르를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Q.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다시 미쟝센 단편영화제에 출품하게 된다면 어떤 장르의 영화로 만나 뵙게 될지 궁금하다.
A. 기회를 주신다면 4만번의 구타로 다시 오고 싶어요. 제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나 비정성시가 추구하는 플롯에는 아직 취약한 것 같아요.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다루기보다는 이야기나 사건이 흥미로운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다음 학기 워크숍으로 준비하고 있는 건 드라마예요. 제작된다면 비정성시로 넣어 볼 계획이긴 합니다.
Q. 곧 <풀 하우스>를 접하게 될 관객분들께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전 포인트를 소개해 주신다면?
A. 관전 포인트라고 하면 거창한 영화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요. 제가 정정할게요, 그나마 눈여겨볼 만한 것! (웃음)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장소는 한정적이지만, 배우들의 표정과 감정 변화가 굉장히 다양해요. 각기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대사와 함께 집중해서 봐 주시면 더욱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Q.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감독님께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 궁금하다. 응원의 한 마디도 부탁드린다.
A.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제가 관객으로 처음 와 봤던 영화제예요. 공식적으로 처음 연출한 작품이, 처음 선정되기까지 해서 저에게는 그 의미가 굉장히 큰 것 같아요. 제 작품이 이 영화제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제가 응원하지 않아도 이미 승승장구하고 있어서. (웃음) 고생하고 계신 스태프분들께 조금만 더 힘내시라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강동인 감독에게 단편영화란?
A. 짧은 영화.
모르는 것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어야 한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모습이 쉽게 우스워지는 반면, 솔직함은 제일 슬픈 아름다움이 된다. 몰라도 너무 몰라 주는 세상에 개의치 않고, 어떻게든 자신이 설 자리를 찾으려는 요한의 시도가 못내 서글펐던 것처럼 말이다.